배가 불러야 풍경이 보인다. 낡고 해묵은 이야기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배가 몹시 고팠던 어느 선비가 지은 시(詩)일 것 같다. 시모노세키 카라토 시장 앞 풀밭에서 우동과 생선초밥을 배불리 먹고 나니 바다 건너 모지코(門司港)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동쪽으론 혼슈와 규슈를 연결하는 칸몬교가 바다 위에 떠있다.
손주 녀석들은 나무젓가락을 놓자마자 시장 서쪽 해향관으로 돌고래 쇼를 보러 달려갔다. 아내와 나는 칸몬해협을 횡단하는 해저터널을 왕복하기로 했다. 입장료가 비싸면 건너지 않을 참이었는데 고맙게도 사람도, 자전거도 무료였다.
바다 위를 연결하는 다리의 길이는 1천68m인데 터널은 780m였다. 지하 9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해저터널이 평면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안내판에는 편도 15분 소요라고 적혀 있었지만 우린 12분 만에 대안의 전망공원으로 올라서서 시모노세키 항을 조망할 수 있었다. 여정이 짧은 여행객들은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을 손쉽게 해내고 나니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뿌듯한 희열을 느꼈다.
해저터널 안은 깨끗했다. 공기도 상쾌할 정도로 맑았다. 조깅복 차림의 선남선녀들이 달리고 있었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노인네들도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릴 적 통영의 해저터널에 가본 적이 있다. 급우들과 어울려 줄지어 터널 안을 한 바퀴 돌아 나온 적은 있는데 그곳이 오래 추억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나 보다. 이 순간 전혀 감흥이 일지 않고 아름다웠던 기억의 토막을 건져낼 수가 없다.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시모노세키~모지코 간 연락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잔다. 불과 5분밖에 걸리지 않는데도 뱃삯은 390엔이다. 비싼 걸 본전 뽑으려면 중간에 엔진 고장이라도 나야 할 텐데 탈은커녕 눈 깜짝 사이에 도착이다.
모지코는 옛날부터 무역항으로 번창한 곳이어서 역사적인 유물과 이름난 건축물이 많은 곳이다. 칸몬해협이란 웅대한 풍경 속에 군데군데 서 있는 건조물은 옛 정취를 내뿜고 있고 최근 만들어진 전망대와 자전거 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 고금이 공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 가족은 해협을 건너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개폐식으로 열리고 닫히는 개도교(블루윙 모지)라는 다리를 건넜다.
'연인의 성지'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이 다리는 길이 24m짜리와 14m짜리가 연결되어 열릴 땐 60도 각도로 각각 하늘로 올라간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 여섯 번 열리고 닫힌다. 연인들이 열렸던 다리가 닫힌 다음에 건너면 평생토록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도시의 인프라 하나를 구축해 두고 거기에 걸맞은 스토리텔링이란 의상을 입혀 놓으면 그것이 설사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관광객들은 몰려들기 마련이다.
'연인의 성지' 덕분에 모지코 일대의 식당과 가게들은 장사가 아주 잘 된다. 연인들을 태운 인력거가 이름난 명소를 안내하고 레스토랑을 끼고 있는 미술관도 관람객들이 북적댄다. 우린 이곳 모지코의 최고 명물인 야끼카레를 꼭 먹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선초밥을 너무 과하게 먹은 탓인지 맛만 보자고 해도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옛 어른들의 '밥 배 따로 있고 술 배 따로 있다'는 말은 거짓말인가. 야끼카레를 못 먹어 본 것이 지금 생각해도 못내 서운하다.
대신에 모지코 비루공방에서 생맥주 한잔을 마시기로 했다. 이곳은 500cc 생맥주 한잔을 가게 안에서 마시면 500엔, 문밖으로 나와 마시는 테이크아웃은 400cc 한 잔에 500엔을 받는다. 일본인들은 장사를 왜 그렇게 할까. '안과 밖'이란 차이에는 고도의 상술, 즉 100cc란 미끼가 손님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는 이 비루공방 앞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장날이 오면 아버지께서는 막걸리 한 되와 파전 한 접시를 시켜 술을 드셨다. 출출한 김에 막걸리를 훌렁 마시고 보니 파전이 남아 있었다. 막걸리 한 되를 더 시키셨다. 이번에는 파전이 남을까 봐 얼른 먹어 치웠더니 막걸리가 남아돌았다. 막걸리와 파전의 박자를 맞추지 못해 장날마다 술에 취하셨다는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나도 생맥주의 박자를 맞추지 못할까 봐 테이크아웃 맥주 딱 한 잔만 마시고 돌아섰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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