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불안의 시대.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다. 남녀와 세대 구분이 없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경제위기가 남긴 그림자다. 특히 빠른 정년퇴직은 불안감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50대 초반에 퇴직한다. 그런데도 노후준비는 꿈도 못 꾼다. 퇴직 전까지 죽도록(?) 일해야 한다.
그렇다고 죽으란 법은 없다. 정년연장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정년연장으로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이 다시 희망을 갖게 되면서 초고령화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20% 이상, 우리나라는 2026년에 진입 전망)를 앞둔 대한민국의 삶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늦춰진 정년, 노후준비 파란불
정년이 57세인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정훈(54) 씨. 지난달 30일 뉴스를 보다가 쾌재를 불렀다. 정년 60세 연장법(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2016년부터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정년이 60세로 연장된다는 소식이었다.
이 씨의 경우 부인과 함께 대구에서 노후를 보내는 데 드는 돈은 한 달에 200만원 정도. 평균수명 78세까지 5억원 가까운 돈이 필요한 터였다. 쥐꼬리만 한 퇴직금과 국민연금을 더해도 필요자금의 50%도 채 마련할 수 없다. 그러나 정년이 60세로 3년 늘게 되면 필요자금의 80% 정도는 모을 수 있다. 은퇴 후 1년만 버티면 국민연금이 나와 퇴직금으로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씨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후 설계를 다시 짜고 있다. 정년을 3년 정도 남겨둔 터라 해외 자원봉사로 노후를 보낼 계획이었다. 지난해부터 틈틈이 관련 자격증도 따고 외국어학원에 다니는 등 열심이었다. "정년이 늘어난 만큼 회사일에 더욱 충실할 생각입니다. 학원도 회사업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그동안 엄두도 못 내던 골프채도 다시 잡기로 했다. 노후의 불안이 조금 사라진 만큼 웰빙노후를 보낼 생각에서다.
노동관련 소송 전문인 최성호 변호사는 "지금까지 직장인들의 실질적인 퇴직시기가 50대 초반으로 소득도 없고 공적인 연금도 못 받는 시기가 8년에서 10년이 된다. 정년연장이 의무화됨에 따라 이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정년이 길어지면 고령 실업자와 노인 빈곤층이 줄어 정부의 복지 비용도 감소하고 무엇보다 근로자들이 보다 여유롭게 장기적인 시각에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고 했다.
◆'58년 개띠'의 엇갈린 운명
지역의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58년 개띠' 나재수(가명'55) 부장은 정년 60세 보장 의무화 소식에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기뻤다. 사실 나 부장은 올 초부터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사 정년(만 58세)은 눈앞에 다가왔는데 40대 초반에 낳은 늦둥이가 대학을 마치려면 아직도 10년은 학비를 대줘야 하고 올가을 딸아이의 혼사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년 연장 의무화가 국회를 통과한 하루 뒤 마침 근로자의 날을 맞아 나 부장은 새치로 희끗희끗하던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했다. 이달부터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회사 내 헬스장에 나가 힘차게 역기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정년연장으로 5년은 더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아직은 쓸만하다는 걸 보여줘야죠'라는 생각에서다.
나 부장의 대학 동기인 유불만(가명'55) 부장.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정년연장 소식이 오히려 부아를 지른 것이다. 유 부장이 다니는 회사는 300인 미만인 중소기업. 그래서 현재 회사가 정한 정년은 같지만 나 부장의 회사와 달리 2017년부터 정년연장이 적용된다. 2016년 만 58세가 돼 퇴직을 해야 해 정년 연장의 혜택을 볼 수 없는 것. '한 끗 차이로 밟혔다'는 생각에 중소기업에 다니는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유 부장은 먼저 퇴직한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치킨집이나 국숫집 등 프랜차이즈 사업 등으로 창업을 할 요량에서다. 그러나 친구들이 사업에 손을 댔다 말아먹었다는 얘기에 가슴이 무겁다. 올해부터 국민연금을 받는 시점이 61세로 올라갔기 때문에 은퇴하면 3년 동안은 연금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무겁다. '용의 꼬리보다 닭의 머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작은 회사를 택했지만 이 결정이 땅을 치고 후회된다. 요즘은 업무시간에도 은퇴 이후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베이비부머 시대의 상징인 '58년 개띠'의 엇갈린 운명이다.
공인노무사인 남명선 대구여성광장 대표는 "현재 기업들의 평균 정년은 58.4세다. 그러나 명예퇴직과 권고사직, 정리해고 등을 고려하면 실제 퇴직 연령은 53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정년연장 관련 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로 1958년생 개띠가 58세가 되는 2016년이면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부터 60세 정년이 의무화되고 2017년에는 전 사업장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현재 실제 퇴직 연령을 고려하면 1964년 이후 출생자(중소기업 기준)부터는 사실상 정년이 7년 연장되는 셈이다. 결국, 중소기업과 대기업 직원들의 불평등이 확대될 수 있는 만큼 추가적인 보완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빛 좋은 개살구?
지역노동계는 반기고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 임금피크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자칫 임금피크제 등이 악용될 경우. 근로자들에게 정년연장이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300인 이상 기업일 경우, 당장 회사 측과의 합의안 마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회 통과 안이 임금피크제 등을 노사합의 사항으로 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년이 연장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일은 더 하고 임금은 덜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기만 대구은행 노조위원장은 "국회 본회의에 통과됐다 하더라도 실제 사업장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들이 필요하다. 대구은행의 경우 정년을 2년 정도 남겨두고 퇴직금을 더 얹어 주고 퇴직하는 준퇴직제도를 시행중이다. 정년연장이 의무화될 경우 전반적인 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300인 미만 중소기업의 경우는 비교적 느긋한 입장이다. 지역의 한 중소기업 노조위원장은 "2017년부터 적용되는 터라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다. 노조위원장 임기도 보통 1년이기 때문에 차기 집행부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산별노조 단위에서 협상안 마련 작업은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강부환 변호사는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는 별개로 논의돼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에서 정년연장의 조건이 임금피크제 도입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임금피크제는 정년을 연장하거나 보장해주는 대신 임금을 삭감하는 제도다. 그런데 이 제도가 단순히 임금 삭감의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회사가 '정년 보장해줄 테니 월급 깎자' 이렇게 나올 수 있다. 심지어 임금피크제가 퇴출 수단으로 악용되는 기업도 있는 만큼 관련기관의 철저한 감시'감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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