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국내에선 '여성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최근 타계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해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세계 각국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북핵 위협을 포함, 동북아시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박 대통령이 여성으로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여성 사학자로 꼽히는 이배용(66) 전 이화여대 총장 역시 국내 여성 리더십의 상징 가운데 한 명이다.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이명박 정부에서는 장관급인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8일 특강을 위해 대구를 찾은 그를 만나 21세기형 여성 리더십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역사 속에서 빛나는 여성 리더십
"흔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도 뛰어난 여성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에서부터 뛰어난 통찰력과 지도력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선덕여왕, 자연을 존중하고 공생을 꾀한 신사임당이 대표적이죠. 대구경북에는 여중군자(女中君子)로 재조명되고 있는 장계향 선생이 있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식혁명시대는 여성들의 장점이 더욱 빛을 발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전 총장은 여성 지도자의 강점으로 외유내강, 직관력, 생명 존중 등을 제시했다. 소서노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고, 선덕여왕처럼 예지력으로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고, 신사임당처럼 생명 잉태를 통한 아낌과 돌봄 정신이 원천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장은 이어 21세기는 부드러움과 상생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따뜻한 리더십'이다. 분열과 대립보다는 어진 마음으로 세상에 온기를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이 제격이며, 여성 리더십은 역사적 조류라는 설명이었다.
이 전 총장 스스로도 '여성 1호'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2004년 한국여성사학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2008년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 2009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을 여성으로서는 처음 맡았다.
"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을 할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회원인 대학 총장님들은 대부분 남자시죠. 저는 굳이 리더십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대신 부드럽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애썼습니다. 총장 사모님들까지 모시고 회의를 열기도 했죠. 그랬더니 나중에는 총장님들이 '우리는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라면서 좋아하시더군요."
이 전 총장은 그동안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하지만,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는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공동의장을 맡았다. 지난 3월 박 대통령이 국가 원로 12명을 초청, 청와대에서 연 오찬에도 참석했다. 박 대통령을 돕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대선은 총선과 달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대 사건이라고 봅니다. 제가 새누리당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정치에 뛰어든 게 아니라 학자로서 역사의 길을 어떻게 여느냐에 대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박 후보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미래의 선진국으로 도약시킬 만한 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대구경북 정신, 미래창의성 본산으로 삼아야
이 전 총장이 강연에서 항상 강조하는 키워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과 '과거는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자연, 나눔, 생명, 배려, 소통 등의 정신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가 평생 제자들에게 설파해온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합니다. 생소한 것을 가져다가 한국의 국가브랜드라고 내세울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지금 시대에 맞게끔 스토리텔링할 수 있다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세계무대에서 확실하게 각인될 것입니다. 역사에서 지혜를 얻은 뒤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과 같은 말이죠."
이 전 총장은 국가브랜드위원장 재임 시절의 보람으로도 서울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과 배우자들에게 우리만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준 일을 떠올렸다. "정상회의 행사를 국립박물관과 창덕궁 등 문화공간에서 연 것은 우리 문화를 보여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정상 배우자들에게 창덕궁에 대해 설명을 해줬을 때 그들은 강한 친근함을 표시했고요. 국가브랜드는 품격에서 비롯됩니다. 그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역사와 문화를 빼고 갈 수 없습니다. 문화는 국가의 브랜드, 이미지, 품격의 기본입니다."
이 전 총장은 평생을 국사 연구에 바친 사학도답게 대구경북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해박한 지식이 인터뷰 내내 술술 풀려나왔다.
"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 대구경북 아닙니까? 또 경주 최 부잣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가문이고요. 지식을 나눴던 조선시대 대표적 서원 9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운동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 중 5곳이 대구경북에 있습니다. 보수적인 지역이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진보적인 면이 많습니다."
이 전 총장은 특히 경주, 안동 등 유서 깊은 곳을 우리의 대표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동이나 경주에는 여러 번을 가도 항상 감동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옛 사람들의 정신과 발자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요즘 젊은 층이 신혼여행을 해외로만 떠나는 것도 아쉬운 일입니다.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의 나라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전 총장은 아들인 안상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역시 자신의 강권(?)으로 국내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귀띔했다.
이 전 총장은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 열풍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요즘 우리 젊은 층의 활약이 정말 대단합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인기죠. 하지만, 대중문화와 차별화된 고품격 전통문화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미국 순방에서 한복을 입은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만 외국 교수들을 만나면 한복에 대한 관심들이 참 많아요."
◆행복한 한국 위한 '주전자論'
이 전 총장은 후배들을 위해 인생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달라는 질문에 '주전자론(論)'을 꺼냈다. '주'는 국민 모두 주인의식을 갖자는 것이고, '전'은 각자의 전문역량을 뜻한다. '자'는 우리 스스로 역사'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갖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게 다는 아니다. 나눔의 정신이 추가된다. "주전자는 물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물을 목마른 이웃에 나눠줄 때 진정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주인 의식, 자긍심을 갖고 자기가 맡은 전문 역량을 키운 사람이 다른 사람까지 배려하면 함께 행복한 세상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 총장은 주전자론이 필요한 이유로 흔한 사례를 들었다.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 외국인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을 보면 먼저 인사하지를 않습니다. 점잖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비문화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따뜻한 우리의 속내와 달리 겉모습이 오해를 부르면 한류 열풍도 오래갈 수 없어요. 자긍심을 갖고 먼저 외국인들에게 마음을 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학자로서 그는 국사 교육에 대해선 쓴소리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세계화를 떠들면서 국사 과목의 중요도가 확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이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영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안중근 의사(義士)가 병 고치는 의사(醫師)라고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다는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학교 교육에서 역사 과목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이배용 전 총장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중'고를 거쳐 이화여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강대에서 구한말 열강의 경제이권 침탈을 다룬 논문으로 한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이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2006년 제13대 이대 총장에 올랐다. 이 전 총장은 "어렸을 때부터 역사과목에 흥미가 많았다"며 "옛날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 하는 것을 좋아해 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방송계로 진출했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 전 총장은 학계는 물론 교육계, 여성계 등에서 왕성한 대외활동을 벌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한국여성사학회'한국사상사학회 초대 회장,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 국립중앙박물관 운영자문위원회 위원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2012년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해외자원봉사자 파견 및 국제개발협력 NGO인 '코피온'(COPION) 총재, 재단법인 한국선진화포럼(이사장 남덕우) 특별위원회 위원장, 교육과학강국실천연합 이사장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상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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