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허창옥 지음, 수필세계사 펴냄/ 새, 허창옥 지음, 선우 미디어 펴냄.
중견 수필가 허창옥 씨가 산문집 '그날부터'와 수필집 '새'를 동시에 출간했다. 산문집 '그날부터'는 작가 허창옥에게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무작정, 어떤 의도도 없이 글을 써 내려가고 싶다. 마음에 들어찼다가 빠져나가는 생각들, 느낌들을 흐르면 흐르는 대로 막히면 또 그대로 쓰리라. 몹시도 아프면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흔들리면서, 환희에 떨면서, 괴로워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쓰려 한다.'
이 말은 작가가 글쓰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사람임을, 다만 감정의 충실한 노복으로 쓰기에 임할 뿐임을 보여준다. 그녀의 산문집 '그날부터'는 누구에게나 있을, 혹은 있었을 '그날'부터 마음 가는 대로 써내려간 글들이다. '그날'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하루일 수도 있고,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애를 써도 특별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없는 밋밋한 날일 수도 있다. 특별한 '그날'이든 밋밋한 '그날'이든 그날은 왔다가 갔고, 먼 훗날 돌아보면 '오늘도 역시 그날'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산문집 '그날부터'는 문득 자신에게 왔다가 머물거나 떠나버린 것들에 대해 쓴 글들이다.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던 지은이는 어느 날 오래된 메모노트를 잃어버렸다. 그날 가슴에 오래 묻어두었던 연인을 잃은 데 버금가는 상실감을 느꼈다. 하여 그날부터 메모를 그만두었다가, 또 어느 때부턴가 메모를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지은이는 메모노트에서 '너는 내 불멸의 신앙'이란 글귀를 발견하고 놀란다. 이처럼 멋있는 글귀가 내 속에서 나왔을 리 없다고, 무슨 책에서 옮긴 게 틀림없으리라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는 사람들은 안다. 어느 날 문득 내게로 왔던 감정이나 표현이 '그날' 뒤로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오래된 메모노트를 다시 뒤적거리면 '이 메모를 적던 나'와 '지금 나'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하는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 '그날'은 다시는 존재하지 못할 '나'인 동시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나'인 셈이다. 허창옥은 그렇게 100명의 허창옥에게 제각각 불현듯 왔다가 가버린 생각들을 산문집 '그날부터'에 고스란히 담았다.
수필집 '새'는 삶을 바라보는 허창옥의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흔히 아는 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솔직한 글'이다. 그러니 허창옥의 수필은 허창옥의 세계관이다.
'(건너건넛집 아지메가 고등어를 손질하는 동안 고등어를 담아왔던 비닐봉지는 바람을 머금고 높이 솟아 단풍나무 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앞 상황 요약) 그렇게 한참을 나부끼고 있었던 것인데 국지성이란 이름의 폭우가 내린 것이고, 가뜩이나 젖은 몸의 손잡이께가 가지에 걸렸으니 그뿐, 어쩌겠는가. 폭우 속에서 검정비닐은 썩지도 않은 몸으로 생을 마치고 있다. 그 태생이 이미 역리였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순리를 끝내 알지 못한다. 그것이 가뜩이나 꼴이 말이 아닌데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가련하다. 그것을 저 가지에서 걷어내어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데 하릴없다. 그것의 최대 비참은 불멸일지도 모른다. (중략) 이제 곧 어두워질 테지. 어둠이 켜켜이 쌓인 캄캄한 밤에 사람들이 다 제집으로 돌아가 깊이 잠든 밤에, 검정비닐은 숨이 멎은 채로 여전히 시커먼 나뭇가지 끝에서 펄럭이겠지. 길고 험했던 밤이 물러나고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이 열려서 비닐봉지의 젖은 몸은 마르겠다. 남은 바람이 건듯건듯 나뭇가지를 털다가 우연히 검정비닐을 지상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겠다. 뭐가 남았을까. 비닐은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분류되어서 저들끼리 태워지든가 땅에 묻히든가 아니면 재생이란 공정으로 다시 태어나든가. 무엇이 좋을까. 그것이 새 몸이 되어 시장에 나간 아지메의 손에 다시 들려지는 게 가장 좋을 것인가. 그래서 또 버려지고 비바람을 맞아서…. 비닐봉지는 아직도 비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있다.(하략)'-ㅇㅇ아지메의 비닐봉지- 중에서.
허창옥의 수필은 영감이 아니라 사유의 산물이다. 깊은 통찰과 사유는 그녀에게 수필의 방법인 동시에 내용이다. 불현듯 눈이 가는 대상을 오래 응시하고, 철저하게 살펴보고, 깊이 생각한 뒤에 작품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시선은 언제나 인간애와 온기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마냥 따뜻한 곳은 아닌데, 왜 그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고 묻는다면 '문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야기이며, 인간 이야기의 핵심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날부터, 183쪽, 8천원/ 새, 239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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