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총각으로 바닷가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경주의 고교 K교장께서 중매를 자처하고 나섰다. 1974년 2월 23일 봄방학을 맞아 경주 '여보다방'에서 교장 선생님과 만났다. 일방적으로 선보러 가자고 해서 그냥 대구로 따라나섰다. 대구 한일아케이드 맞은편 한일빵집으로 갔다. 교장 선생님과 함께 기다렸다.
부모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교장 선생님을 따라 생전 처음 보는 선이라 좌불안석이었다. 모두 나가고 둘만 남았다. 내 행색에 대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바지가 구겨진 채로, 수염도 못 깎고, 구두에는 시골 흙을 그대로 묻혀 선보러 나갔던 것이다. 이름과 결혼 조건을 묻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전화연락이 없으면 결혼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하였다. 이튿날 친구 집에서 전화벨 소리를 기다렸지만 끝까지 울리지 않았다. 선을 본 것도 잊어버리고 바닷가 초등학교에서 열심히 아이들만 가르쳤다.
토요일 경주 '여보다방'에 다시 들렀다. 안쪽에서 K교장이 손짓을 하셨다. "내가 하도 답답해서 나섰네. 자네 백형께 들러 사성 받아 대구로 가네. 찻값은 자네가 내게." 할 말이 없었다. 처가에서는 야단법석이 났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사성이 오면 결혼과 마찬가지로 간주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열 번째 막내아들이 장가를 간다고 하니까 무척 좋아하셨다.
장인 되실 분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 생활을 모두 내보일 수 있는 나의 일생을 정리한 흑백 사진첩 2권을 드렸다. 3월 16일 동대구고속터미널 휴게소에서 장인 되실 분을 다시 만났다.
"결혼하면 어떻게 먹고살 것이냐?"고 물으셨다. "교사는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사진첩 두 권으로 장인 되실 분의 인정을 받고 1974년 4월 20일 오전 10시 달성공원의 호랑이가 울 시간(?)에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첩이 없었으면 까딱 잘못했다간 결혼도 못할 뻔하였다. 이영백(대구 수성구 범어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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