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사의 흐름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명성이나 활동의 내용이 상당히 화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대표적 사례가 가수 최남용(崔南鏞'1910∼1970) 선생이 아닌가 합니다. 한 번 유명가수로 고정된 분들의 이름은 줄곧 가요사에 등장하는데 최남용의 경우는 어떻게 해서 이토록 대중들의 기억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가수 최남용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1935년 10월에 당시의 인기 대중잡지였던 '삼천리'지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의 결과를 먼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 투표의 결과에서 1위는 채규엽, 2위는 김용환, 3위는 고복수, 4위는 강홍식, 그리고 5위에 오른 가수가 바로 최남용입니다. 서양의 테너가수 티토 스키파(Tito Schipa)를 연상시키는 맑고 깨끗한 미성에다 얼굴이 워낙 잘 생겨 희랍의 조각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꽃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최남용은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수완이 좋고 부유한 '송도상인'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성장기 때부터 내성적이고 감상적 기질이었던지라 문학, 음악 쪽으로 호감을 가졌었고, 송도고보를 다니던 중에는 달 밝은 밤에 기타와 바이올린을 들고 선죽교와 만월대로 가서 악기연주와 가창연습에 심취했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이 기울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쌀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미곡상(米穀商)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최남용은 사업에 종사하면서도 틈틈이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가 고향 개성을 다니러 왔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 최남용에게 찾아와 서울로 가자고 권유했고, 이애리수는 그를 자신이 전속으로 활동하던 빅터레코드사 이기세(李基世) 문예부장에게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최남용이 22세 되던 1932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빅터레코드사에는 이애리수 외에도 동향 선배인 작곡가 전수린 선생까지 있어서 한결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최남용은 오디션을 거친 다음 1932년 12월, 데뷔 작품으로 '갈대꽃'(이고범 작사'전수린 작곡), '마음의 거문고'(이고범 작사'김교성 작곡) 등 두 곡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빅터사에서 '덧없는 봄비' '방아타령' '산나물 가자' '눈물과 거짓' '서울소야곡' '사공의 노래' 등 30여 곡을 발표했습니다. 1935년 8월 '애달픈 피리'를 마지막 작품으로 발표하고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빅터레코드와 결별하게 되었지요. 빅터 시절에는 '홍작'(紅雀)이란 예명으로 일본 빅터사에서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빅터사에서 활동할 때 가장 콤비를 이루던 작사가는 이고범(이서구), 이하윤, 이현경 등입니다. 그 밖에도 시인 김안서, 김팔봉 등과 이벽성, 유백추, 고마부, 이청강, 박영호, 두견화 등과도 함께 했습니다. 콤비 작곡가로는 단연코 15곡의 김교성, 8곡의 전수린 등 두 분입니다. 그 밖에도 장익진, 정사인, 이하윤, 이경주, 조일천, 이경하 등이 있습니다.
당시 가수들은 한 레코드사에서 전속으로 활동하면서 조만간 다른 회사로 소속을 옮길 계획이 있는 가운데서도 두 회사 이름으로 제각기 음반을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최남용도 이에 해당합니다. 1935년 1월에 '즐거운 연가'와 '거리의 향기' 등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을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합니다. 소속사를 완전히 옮긴 다음에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노라면 바로 이 음반이 태평에서 발표했던 첫 앨범으로 기록이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는 구룡포(具龍布)란 예명과 최남용이란 본명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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