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시청률 조사기관이 최근 발표한 올해 상반기 결산자료에 따르면 종합편성채널의 평균 시청률은 1%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난세(亂世)에도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프로그램들은 있다. 매일신문과 제휴하고 있는 채널A가 지난해 2월부터 내보내고 있는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 대표적이다. '화끈한' 주제가 나가는 날에는 시청률이 3%를 훌쩍 넘는 등 종편 대표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혼자 먹어서 죄송합니다"와 같은 유행어를 쏟아내며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로 '떠오른 이영돈(56) PD를 만나봤다.
◆'먹거리 암행어사'
이달 17일 대구경북중소기업청 특강을 위해 대구를 찾은 이 PD는 "직접 만나면 TV 화면보다 착하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말문을 뗐다. 부산 사투리가 섞인, 특유의 어눌한 말투였지만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했다. 종편으로 옮기기 전 공중파에서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주로 했던 터라 날카로운 이미지가 굳어졌을 법했다. 그는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 '소비자 고발' 등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최근에 '먹거리 X파일'이 화제가 되면서 얼굴이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불편할 때도 물론 있지요. 얼마 전에는 지방 촬영을 갔다가 밤늦게 통닭집에 들렀는데 20분이 지나도 음식이 안 나오더군요. 사연인즉 저를 알아본 사장님이 새 식용유로 튀겨내느라 늦어졌다는 겁니다. 하하하. 제 말투를 패러디하는 개그맨이 늘면서 음식 CF도 꽤 들어오지만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 PD가 검증에 나섰던 음식 재료들은 상당한 후폭풍을 겪었다. 시청자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방증이다. MSG'나트륨'빙초산 소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도 그의 공이 크다. 그는 'MSG 선택제'란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식당에서 화학조미료를 넣어 조리하지 말고 별도 양념통에 담아 식탁 위에 비치,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다. 당연히 음식 선택이 무척 까다로울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두 끼 정도만 집에서 먹는데 매번 '착한 식당'만 갈 수는 없는 노릇이죠. 물론 단골집은 있지만요. 그보다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는데 우리나라의 음식문화가 달라지고 있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방송 이후 확실히 천연조미료 사용은 늘고 있고, 빙초산 소비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맛의 개념이 재정립되고 있는 듯해 기쁩니다. 저희 집 주방도 뒤져봤는데 다행히 MSG는 없더군요."
'착한 식당'은 '먹거리 X파일'의 인기 코너다. 지금까지 33곳의 식당이 '착한 식당'으로 인증받았다. 부제도 '모자이크를 벗겨라'이다. 공개적으로 칭찬해줄 만큼 검증에 자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생각하는 '착하다'라는 단어의 뜻이 궁금해졌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정직하게, 성실하게 하는 음식점들이죠. 먹을거리에 대해 원칙과 고집을 갖고 있는 분들이죠. 이런 식당들을 소개하면 장사가 잘되기 마련입니다만 제가 정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착하게 살아도, 잔꾀를 부리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얼마 전 '착한 식당 재검증' 편이 나간 뒤 반찬 재활용 등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된 음식점을 왜 그냥 두느냐는 비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고친다면, 음식에 대한 그 소신만큼은 높이 살 만 하지 않을까요?"
'먹거리 X파일'의 경우 10개 팀이 돌아가며 취재한다. PD와 작가, AD, 리서처 등 4명이 한 팀을 이룬다. 아이템 선정과 기획회의, 가편집 시사회에는 이 PD가 참여한다. "창의성이 돋보이는 시즌 2를 준비 중"이라는 게 이 PD의 귀띔이다.
◆새로운 전형의 임원 VS 공공의 적?
이 PD는 방송 프로듀서로는 드물게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을 2개나 진행하고 있다. '먹거리 X파일'과 '논리로 풀다'이다. 방송사가 그의 '상품성'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그 자신도 "언론사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에 기여한 것 같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의 공식 직함은 '채널A 제작 담당 상무'다. 자신의 프로그램 이외에도 드라마'예능 프로그램 제작을 총괄한다. 신생 언론사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만한 막중한 자리다. 그의 표현대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치는 것도 모자라 춤까지 추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방송계에는 '새로운 개념의 임원'이라는 칭찬과 함께 '공공의 적'이라는 질시가 공존한다.
"'독재자'라는 이야기를 듣곤 하죠. 워크홀릭(workholic'일 중독자)인 것은 부인할 수 없고요. 집의 아이들도 '아빠가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동시에 여러 업무를 처리하는 스타일이거든요. 하지만 모든 것을 제가 다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회사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 일선에 나서지 않고 큰 틀만 짜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시작한 '먹거리 X파일'도 2년 채운 뒤에는 다시 생각해봐야지요."
몇 년 뒤 그의 모습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 욕심'이 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텍스트보다는 영상에 이끌렸습니다. '할리우드 키드'이기도 했고요. 제 프로그램은 모니터링하지 않지만 요즘 잘나간다는 프로그램은 다 챙겨서 봅니다. 아침 8시에 출근했다가 밤 12시쯤 귀가하는데 잠들 때까지 TV를 켜놓고 채널을 계속 돌립니다. 그래야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32년차 PD인 그는 KBS '개그콘서트' 같은 코미디 연출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과거 '주병진 쇼' '박중훈 쇼'와 같은 토크 프로그램을 연출한 경험이 있다. 어느 정도 완성도가 있으면 시사 프로그램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서로 통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시사 프로를 보는 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본능적인 것이죠. 그런데 '개콘'을 보면 가족'회사 상사와의 관계 같은 시사성(時事性)이 담겨 있어요. 웃으면서 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들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아마 '개콘' PD는 시사 프로를 맡아도 잘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개콘' PD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란다. 결국 그는 그날 저녁 늦게 문자로 '개그콘서트를 처음 만든 PD는 tvN에서 '코미디 빅리그'를 연출하고 있는 김석현 PD'라고 알려왔다. 순간 그가 인터뷰 중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한 팩트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스토리텔링을 잘해야 보는 사람이 재미있습니다."
◆"정직한 사람 많은 세상 됐으면"
이 PD는 터부(taboo'어떤 말이나 행동을 금하거나 꺼리는 것)를 깨부수는 데 이골이 났다. 민감한 사안을 다루다 보니 로비'협박 또는 반발도 많았다. 언론중재, 방송중지 가처분, 민'형사 소송 등 언론인이 겪을 만한 법적인 조치들은 거의 다 겪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됐던 것은 '황토팩 사건'이다. KBS '소비자 고발'에서 유명 황토팩 제품에서 중금속이 검출됐다고 방송한 혐의로 고소됐다가 4년 만인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최근에는 자신이 진행하는 '논리로 풀다-전생' 편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이 방송에서 자신을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선비' '지금이 최고의 정점이며 훗날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는 전생 연구가들을 향해 돌직구를 던져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사주팔자는 어느 정도 믿는 편입니다. 인생의 큰 흐름이나 적성 같은 것들이죠. 하지만 비과학적 이야기로 혹세무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도 흰소리를 하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얼마나 위압하겠습니까? 심리학에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현상을 정작 듣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 운운하는 것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혈액형이 500여 가지나 된다는 사실은 아세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거침없이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여러 차례 직장을 옮긴 것에 대해서도 "새로운 일이 재미있어 보였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KBS에 입사했다가 몇 년 뒤 호주로 이민을 갔습니다. 방송일은 그곳에서도 계속 했고요. 다시 돌아온 뒤 1997년에는 대구에서 근무하기도 했는데 청바지 차림에 노란 고무줄로 긴 머리를 묶고 다녀서 이상하게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나 할까요. 허허허."
그에게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역시 일 벌이기 좋아하는 그다웠다. "정직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착한 식당'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직접 착한 먹을거리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언제까지 고발 전문, 저승사자, 암행어사로만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이영돈 PD는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인천고를 거쳐 고려대에서 신문방송학 학사'방송학 석사'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KBS에 입사한 뒤 1991년 SBS 개국에 참여했다가 KBS로 복귀해 교양제작국장, 기획제작국장 등을 지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주병진 쇼' '추적 60분' '소비자고발' 등을 연출하면서 한국방송대상 연예오락TV 부문 우수작품상(1993), 한국방송대상 교양TV 부문 우수작품상(1994), 한국언론상(1996), 한국방송프로듀서상 다큐멘터리 부문'방송위원회 대상(이상 2007) 등 숱한 상을 받았다. 이 PD는 "1999년 KBS에 있을 때 만든 6부작 '술'담배'스트레스에 관한 첨단보고서'는 최근 시행에 들어간 음식점 등 실내흡연 규제의 시발점이 됐다"며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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