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아 나섰습니다. 낯익은 산길을 걷고 무더위가 물러간 들녘도 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불과 30여 분의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근 반년 만의 걸음이었습니다. 걸음 닿는 곳마다 가을빛이 완연하더군요. 포도밭으로 바뀐 논에서는 소락한 바람 내음과 나락 향 대신에 익어가는 포도의 단내가 물씬 풍겨납니다. 콩밭에선 진록의 튼실한 콩깍지들이 옹기종기 풍년을 매단 듯하고 해바른 고추밭에서도 오이만 한 고추들이 진홍으로 익어갑니다.
소음의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고속열차의 굉음이 귀에 거슬리곤 하지만 고향 마을에 들어서면 낯익은 산과 들이, 그리고 골목골목 들어앉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괜스레 마음이 짠해 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동네 어귀에 아주 낯선 집 한 채가 위엄 있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도드라진 가옥의 양식이나 규모가 나지막한 마을의 집들과는 좀 이질적인 듯하고 문을 연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 생흙 내음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널찍한 황토 마당 가에는 크고 작은 독과 항아리들이 엉기성기 놓여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전국의 스물다섯 개 마을 중에 적지로 선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집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이 행안부의 '희망마을'로 선정되면서 이 집이 지어졌어요. 주민들의 쉼터와 아울러 농외소득을 올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마당에 흩어져 있는 제각각의 독들에 관심이 갔습니다. 건축물이 정부지원금으로 지어질 때 동민들이 가호당 다소간의 자부담을 해야 할 입장이라 '희망마을' 집을 아름답게 꾸미자는 뜻으로 집집마다 독을 하나씩 내놓기로 한 것이라더군요.
나는 그 주민 부담을 하필이면 독으로 했을까 의아해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독들은 옹기 굴에서 나온 이후 첫 나들이가 아닌가 합니다. 집안에서 독이야 장독대나 부엌 등 아낙들의 전용공간에서 된장이나 곡식을 담아두는 그릇이었지만 이곳으로 모인 독들은 이제 세간과 거리가 먼 '볼거리로서 독'이 된 것입니다.
평소 우리네 장독에 미적 의미를 부여하곤 하던 나는 얼마 전 가창의 ㅇ갤러리에서 열린 전통 독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설치미술가 박신 교수는 '남국의 빛 그 짓거리'라는 제목을 붙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300여 개의 독을 노천에 전시해 놓았습니다. 다양한 독과 항아리들이 나녀처럼 불그스름한 자기 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무언의 '짓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것 혹은 운두가 높거나 낮은 것, 도톰한 입술같이 전이 두껍거나 얇은 것들이 함께 섞여 있고 심지어 몸통이 쭈그러지고 금이 가다 못해 철사 줄로 동여맨 것들도 선보였습니다. 독들은 마치 하나의 큰 캔버스 위에 점과 선으로 이어진 한 폭의 소박한 그림 같았습니다. 크기와 모양새가 서로 다른 여러 독이 이형적인 간극을 넘어 대화와 소통으로 거리감을 좁히면서 새로운 질서를 이뤄내고 있었습니다.
고스란히 제 알몸을 드러낸 독들은 여명과 일몰에 따라 또 다른 이미지로 변신하기도 하고 파란 잔디밭 위의 밝은 햇살을 불러들여 투박하나 찬란한 독 빛을 뿜어내는 무희가 되기도 합니다. 아련한 향수까지 배어나게 하는 독들은 그릇이 아닌 무한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볼거리였습니다.
한참 동안 독들이 조곤조곤 쏟아내는 저마다 다른 독특한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해했답니다. 비단 독뿐이겠어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폐품이 명품으로 거듭나게 되고 고착된 것에 변화의 날개를 붙이게 되는 것을요. 이것이야말로 재구성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상상력과 디자인의 힘을 접목하면 새로움은 저절로 뒤따라오기 마련이지요.
고향 마을의 그 독들도 이젠 더 이상 그릇이 아닙니다. 고정된 자기 공간으로부터 다른 세계로 한 걸음 이동해 오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어 자기 역할을 해나가게 되겠지요. 참신한 발상으로 '희망마을'의 집 꾸미기에 참여한 독들의 미래가 여간 궁금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주민들은 물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서로 열린 소통을 하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이벤트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gang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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