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미안하오, 고맙소

어쩌다 보니 올 추석에는 나 혼자 큰댁에 가게 되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데다 짐이 많아서 택시를 타야 할 형편이었다. 명절이라 택시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빈 택시가 없기도 했지만 있더라도 기사는 손을 저으며 그대로 지나쳤다. 자기도 차례 지내러 가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불편하긴 하지만 좋은 현상임에는 틀림없었다. 한때는 택시기사들이 명절 대목을 놓칠세라 차례(茶禮)마저 포기하고 일을 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뜻이리라. 택시를 포기하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아차, 잔돈이 없다.

"기사님 죄송해요. 잔돈이 없네요." 1만원짜리를 내며 머리를 조아렸다. 명절 아침부터 부주의하여 기사를 번거롭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기사가 퉁명스럽게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현충로에서 외국인 근로자 한 사람이 탔다. 손에 1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가 어눌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월급을 타서 잔돈이 없습니다."

기사가 당장 내리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근로자는 거듭 사과했다. 기사는 차를 세운 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저씨! 너무 하시는군요. 제가 저 사람 차비 낼게요."

요금함에다 근로자의 차비를 넣었다. "너무하다니? 이 아줌마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 버스기사가 '끼∼익'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더니, 내 앞에 우뚝 와 섰다. 얼굴까지 붉히며 일사천리로 쏘아붙였다.

"나는 지금 명절에 차례도 못 지내고 일하는 중이다. 버스 기사나 택시 기사나 똑같은 운전사인데 우리만 왜 명절에도 일을 해야만 하나. 게다가 당신도 1만원짜리를 내고, 저놈도 1만원짜리를 내는 바람에 기분이 더럽다. 돈 자랑하느냐?"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미안하오, 기사 양반!"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은 연세가 지긋한 노신사였다. 젊은이의 자리 양보를 굳이 사양하고 손잡이를 탄탄히 잡고 서 있는 노인이었다. 거의 팔십은 되지 않았을까.

"진정하시구려. 덕분에 우리가 명절 차례에 참석할 수 있잖소. 버스는 택시와 다르지요. 대중교통 아니오? 이것 아니면 우리 같은 서민이 어떻게 움직이겠소. 우리가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승객들이 우우 기사를 격려했다. 기사는 못 이긴 척, 제자리로 돌아갔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창 밖에는 가을 하늘이 맑았다. 올 추석 유난히 크고 밝았던 달도 우리 모두의 응원 덕분이 아니었을까?

小珍 박기옥/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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