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토리가 있는 마을을 즐겨 찾습니다. 땡볕살의 더위도 마다하였는데 갈대잎 서걱이는 가을빛 소소한 이 계절의 탐방은 더욱 즐겁습니다. 마을의 풍광을 살피고 살아온 내력을 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아슴아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노라면 시공을 뛰어넘는 재미에 흠뻑 빠져버리지요.
일전에 문경시 현리를 다녀왔습니다. 그 마을의 채씨 종가를 비롯하여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둘러싼 비바람에 바랜 낡은 토담이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했습니다. 유연한 곡선을 이루는 담장 위로 짚 이엉을 만들어 올린 토담 덮개가 썩고 허접한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옷을 갈아입듯이 해마다 덧입힌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랫부분은 썩지만 윗부분은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 층층을 두껍게 만들어 나갔다고 하니 토담의 높이만큼이나 높게 쌓여진 덮개를 지고 있게 된 것입니다. 종가의 대문 좌우로 펼쳐진 담 위에 수십 년이 된 두꺼운 담 덮개를 보노라니 그것은 낡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삶이 묵어 밴 이야기로 덮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세월의 덮개였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토담이지만 시루떡 첩 같은 그 담 덮개는 내가 만난 특별한 풍경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혼합 속에 놓여있습니다.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구태를 벗어버리는 새것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두꺼운 나이테를 지녀온 것들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속도감 있는 현대사회에서 유무형의 대상에 나이를 더하게 하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습니다. 명줄을 이어나가는 일이자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요.
가을에 접어들면서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많은 축제프로그램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지난달에는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3'행사로 5천년 동안 축적된 문화의 길을 누빈 한국과 터키 간의 축제 분위기를 띄우더니 대구시에서는 '운명의 힘'으로 문을 연 오페라 축제로 대구시를 출렁거리게 합니다. 그야말로 축제의 가절이 온 것이지요.
전국의 지방자치 단체가 주관하는 축제는 연중 1천여 개를 상회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대한민국을 축제공화국이라고도 하더군요. 그 중에서 채산이 맞는 축제는 겨우 몇몇에 불과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지역민들에게 축제로 하여금 건강한 일탈과 재충전을 가능하게 한다면 더없이 좋은 프로그램으로 봐야겠지요.
축제도 나이가 들기 마련입니다. 그 많은 축제의 생명주기는 얼마나 될까요. 지방화가 성숙되어가면서 봇물 터지듯이 범람한 지역축제는 세분화된 다양한 주제로 시연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절로 사그라지기도 하고 두 주제를 하나로 통합하여 시행하기도 하며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명을 다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이름의 축제를 대체하노라니 축제공화국이라는 세평을 듣게 되지요.
문화와 예술의 많은 부분은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어 밴 것일수록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축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콘텐츠의 밀도가 높아야 참여자들이 감정을 풀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한 해 한 해 나이테를 더해 나가면서 말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한가위도 우리 민족의 축제 아닙니까? 세태가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어린 날부터 체감 되어 온 한가위의 정서는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설레는 감정을 지우지 못합니다. 부푼 동심 이상으로 가파른 호흡을 한 박자 쉬게 하는 여유를 갖게 되지요. 수천 년의 나이테를 지닌 대축제이니까요. 세계적인 군악축제로 평가되는 영국의 에딘버러 군악제는 이미 6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마을의 문을 닫는 시각, 그러니까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고적대 소리(tattoo)에서 축제의 뿌리가 되었답니다. 삶 속에 내재된 아주 사소하고도 밀착 된 주제를 승화시켜 해가 거듭될수록 깊이가 더해지면서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해 나간 것입니다.
축제의 나이테는 주민들이 결정합니다. 향토색 짙은 이야기에 근거하고 주민들이 공감하는 축제이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애환이나 희망 등 주민들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주제를 찾고 거기에 정서의 밑바탕을 자극할 수 있는 신명나는 축제프로그램을 만들어 감정의 결집과 이완의 미감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내실 있는 농익은 축제가 되어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 축제의 기대감에 설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gang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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