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가 정규리그 3연패의 신기원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류중일 감독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1990년대 중반쯤 류 감독과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그는 선수생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출장 횟수도 줄어들 때였다. 인터뷰 말미에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둑이고 실력은 2급 정도'라고 했다. 그의 말을 믿고 지면에 그대로 실었는데 결과적으로 오보(?)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바둑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야구 관계자의 사무실에 들렀더니 마침 류 감독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류 감독의 실력을 알아볼겸 바둑판을 보니 웬걸 하수 중의 하수였다. 류 감독은 흑돌을 쥔 것은 물론이고 흑돌을 새까맣게 깔아놓고 접바둑을 두고 있었다. 10급이 될까말까 할 정도였다. 필자가 "2급 실력은 어디갔나"하고 농담을 던졌더니 그는 다음 착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머리를 긁적이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필자가 보기엔 류 감독은 당시 소심하고 조용한 선수였다. 당대 최고의 유격수였지만 스타선수들에게서 흔히 보이던 현시욕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 제일 잘 나가는 감독이지만, 말빨도 없고 제스처도 거의 없다. 네티즌들은 그를 '관중일'이라 부른다. 경기중 관중처럼 가만히 있다가 선수들이 잘하면 박수를 몇 번 치고, 선수들이 못하면 인상을 약간 찌푸릴 정도로 제스처가 없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며칠 전 정규리그 3연패를 한 뒤의 인터뷰 일성이'저는 행복한 놈 같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영락없는 대구 촌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년전 한국시리즈 첫 우승후 모교인 경북고동창회에서 류 감독에게 강연요청을 했는데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는 말 주변이 없다"며 고사를 했다고 한다. 여러번 우승한 감독이라면 TV에 자주 나오고 책도 출판하기 예사인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그 자신만의 독특한 야구철학과 고집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선수들에게 믿고 맡기는 그의'믿음 야구'는 삼성 구단에게는 아주 바람직한 모토다. 과거 삼성은 야구를 못해서가 아니라 선수들을 응집시키는데 실패해 번번이 고배를 마셔왔던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삼성이 야구를 잘하면 대구경북인들도 덩달아 즐겁다. 류 감독이 부디 올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해 '한국 야구계의 퍼거슨'으로 남아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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