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시(詩)-우대식(1965~)

시는 나를 일찍 떠난 내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내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 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災)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피면

가늘고 푸르게 떨리는 정맥

그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시집 『설산 구경』(문예중앙, 2013)

시는 현실에는 없고 마음에는 있는 것을 숙주로 삼는 데는 선수다. 어머니가 시퍼렇게 살았다면, 잘난 아버지가 있었다면, 애인과 참하게 연애하여 결혼했다면 시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마음에는 충만하고 현실에는 터럭 한 올 찾을 길 없는 이 극한 부재의 화신이 시다. 없는 것을 우상처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바닥까지 인정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우대식 시인이 시를 쓰기까지의 과정 또한 그러하다.

자신의 안팎에서 출발한 시는 심도와 확장을 더해간다. 현실에는 없고, 마음에는 충만한 이 부조리에 끊임없이 '부'자를 떼어내려는 노력을 한다. 이를테면 전쟁터에서는 평화를, 억압의 공간에서는 자유를 그려낸다. 인류가 그런 시들을 가지게 된 것도 우선은 시인들이 개인의 영역에서 고통과 맞서 싸운 훈련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시인들이 시를 쓰게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한 고백은 거개가 이런 유형이다. 그들은 고통에 대한 수많은 위로의 방법 중에서 하필 시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시 쓰기는 자신이 받은 위로를 세상에 돌려주는 채무이행 과정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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