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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시와 함께] 우물-박형권(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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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 번 귀뚜라미를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미로 변신하여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봐야겠다.

-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사, 2009)

가을 우물물은 유난히 차고 맑다. 한로의 맑고 찬 이슬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우물로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두레박을 타고 세상 구경 한 번 더하고 어느 경로를 거쳐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어갈 것이다. 물도 겨울잠을 잔다.

귀뚜라미는 날개가 책이다. 책을 펼치고 열심히 글을 읽는다.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 가을밤이 쓸쓸한 사람들은 그것을 울음소리로 듣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낭랑한 소리가 '가을밤처럼 차갑게'(백석의 시구) 느껴진다.

아, 나는 시인 자격이 없다. 아직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를 쓰지 못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다. 귀뚜라미 소리를 마음으로 듣지 않고 머리로 듣는 소치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귀뚜라미로 변신하여 우물의 깊이, 가을의 깊이를 재지는 못할 것이다.

귀뚜라미 사체를 본 적이 있다. 다리를 뻗고 있었다. 노상 무릎을 꺾고 가을 타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던 거리의 악사. 그 노고를 생각하면서 다리를 주물러 주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다. 면책사유가 될는지.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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