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예술가와 관객에게 돌려주자

2010년, 2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루마니아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 갔었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200㎞ 정도 떨어진 인구 30만 명의 '크라이오바'라는 도시에는 160년 된 국립극장이 있었다. 유럽 유수의 극장들처럼 외관이 그렇게 인상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분장실, 연습실, 제작소 등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겨내는 멋스런 극장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극장의 예술감독이 8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술감독은 우리로 치자면 극장 관장일 터이다. 축제의 예술감독이 따로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그 할아버지는 앞서 10년간 극장의 관장을 하다가 현 관장에게 물려주고, 축제 감독직을 8년째 맡고 있었다. '역시 유럽이라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니지, 60년이 넘는 역사의 아비뇽축제도 예술감독이 장 빌라르부터 해서 5명밖에 없었잖아'라는 사실이 생각나자 유럽에선 이 정도는 '기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작고하신 허규 선생께서 국립극장장으로 계신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만 7년 6개월의 임기가 아마도 한국의 공공극장 관장 임기로는 최장기 기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국립중앙극장의 모습은 이 시기에 틀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민간조직으로 눈을 돌려보면 그 예는 많아진다. 지금은 명예 위원장으로 한발 물러선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1996년부터 15년 동안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해왔다. 한국의 현대적인 공연예술 축제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춘천의 두 축제, '인형극제'와 '마임축제'는 나란히 1989년 첫발을 내디딘 후 20년이 넘는 지금까지 강준혁, 유진규 두 예술감독이 이끌고 계신다.

가을이 깊어가며 비어 있던 대구의 공공 예술기관, 조직 등의 수장이 정해지고 있다. 인사가 만사라고, 그동안 대구 문화예술계의 수장을 정하는 데는 늘 많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자리를 맡느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만큼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분이 자리를 맡으실 거라 기대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충분한 자율성과 시간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아닐까 싶다. 문화예술계의 리더는 전장에 나간 장수가 아니다. 그분들은 숲을 가꾸고 땅을 일구고 세상의 공기를 바꾸는 분들이다. 행정이나 정치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화예술기관이나 극장에 아무래도 바라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전문가에게 맡겼으면 기다려주자.

극장은 예술가와 관객의 것이다. 예술가와 관객이 만나 전해주는 에너지와 파동은 간혹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기도 하는 법이니까.

최영 수성아트피아 공연기획팀장 furyo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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