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누거수와 사람들] 체찰사 광주인 한음 이덕형과 선화당 앞 회화나무

경상감영 대구 유치 주인공…공로 기려야

충청남도나 경상북도의 도청 이전에서 보듯이 어느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행정청의 설치가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서로 유치하려는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으로 조정에 애를 먹는다. 그러나 대구는 이런 문제 없이 경상감영이 들어섰다. 이 점 혜택받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최하 말단기관인 대구현(大丘縣)에서 1419년(조선 세종 1년) 차상위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662년이 걸렸다.

1601년(선조 34년) 감영이 설치되고 지방행정의 수장 관찰사가 집무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감영(監營)은 행정은 물론 사법, 군정까지 통괄하는 기관이다.

경상감영은 한때 상주, 안동, 경주 등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혹독한 국난을 겪으면서 대구로 이전되었다. '대구부사'나 '대구시사'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군사작전상 중요한 곳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임란 중 조선군은 물론, 왜군, 명나라 군사들까지 진주하거나 통과했다. 심지어 왜란의 주범 풍신수길은 조선에 출병한 왜군 지휘총본부를 대구에 두고자 했다.

둘째, 상주나, 안동, 경주는 한 쪽에 치우쳐 경상도 전체를 통할(統轄)하는 데 어려운 점이 많은 데 비해 대구는 경상도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셋째, 평야가 넓고 기름져 농산물이 풍부하고 큰장 등을 통해 물자의 조달이 용이했다.

그러나 경상감영이 대구에 오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한 관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 때문이었다. '대구부읍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체찰사(비상 시 군대를 지휘하는 직책) 이덕형이 장계(狀啓)하여 본부(대구부)에 유영(留營)하여 (감사로 하여금)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고 (부에는) 별도로 판관을 설치할 것과 경산, 하양, 화원 등 여러 현을 본부에 할속(割屬)시키도록 청하였다.'

즉 체찰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이 임금께 보고하여 대구로 오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후 대구는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방할 때까지 309년간 경상도(오늘날 대구'부산'울산'경북'경남) 제일의 도시로 위상을 높이고,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의 대구가 있기까지 제일의 공로자는 한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본관이 광주(廣州)로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때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명나라와 교섭해 파병을 성취시켰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 당상을 겸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하였다. 그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고 그 뒤 영의정에 이르렀다.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관직에서 물러나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앞에는 감영의 역사와 함께했을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체찰사 한음 이덕형 나무'라고 하여 대구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 준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울러 옮겨온 날을 시민의 날로 지정했으면 한다.

당시 감사는 선산인 김신원(金信元'1553~1615)이었다. 청사를 새로 짓지 않고 선화당, 징청각 등 주요 건물은 안동에서 그대로 옮겨 왔다고 하니 임란 후 나라 살림이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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