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출신 '문인화 대가' 서병호 선생 기념관 짓자

최길영시의원 의회서 건의 "추사 버금가는 화풍·필법 중국·일본까지 널리

한국 근대 문인화의 마지막 대가인 대구 출신 석재 서병오 선생.
한국 근대 문인화의 마지막 대가인 대구 출신 석재 서병오 선생.

한국 근대 문인화의 마지막 대가인 대구 출신의 석재(石齋) 서병오 선생(1862~1935)의 기념관을 하루빨리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구시의회에서 제기됐다. 최길영 대구시의원은 30일 시의회 임시회에서 "대구경북의 문화적 자부심을 지역민에게 심어주고 외지인이나 외국인을 끌어올 수 있는 문화관광 자원으로 석재 선생의 기념관 건립 추진이 하루빨리 필요하다"고 밝혔다.

석재 선생은 대구시 동성로에서 태어났으며 추사 김정희에 버금가는 필법과 화풍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명성을 떨쳤다. 최 의원은 "대원군은 석재 선생을 두고 '압록강 이남에서는 처음 난 인재'라 하였고 중국 서화의 대가 포화는 '조선의 두보요 이백이다'라고 극찬했다"며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발족시키고 대구를 서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최 의원은 "석재 서병오 선생 기념관을 조성해 선생의 탁월한 예술세계를 알리고 이를 통해 영남문인화를 부활시키고 대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석재는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이자 풍류객이요 서화가이며 능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하여 '팔능거사'로도 불린 인물이다. 그는 소년 시절 재능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당대 문인화의 대가로도 유명한 대원군으로부터 석재라는 호를 직접 받았다. 그 후 중국과 일본의 대가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가졌으며 그 필명과 문명이 동아시아 전체에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에는 고향인 대구에 머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가 대구에 머물던 시기 대구는 전국 서화계의 중심지였다. 인촌 김성수의 호도 석재가 지어준 것이다.

그의 서체는 중후하고 조형적 미와 강인한 필력을 특징으로 하며 영남 일대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대구 인근 사찰, 서원 등에 많은 편액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 또한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소장가들에 의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소장자들이 기념관 건립 시에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어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고, 석재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지금처럼 비조직적이고 단편적으로 흐를 경우 석재 기념사업은 동력을 잃고 그의 작품들도 유실될 우려도 없지 않아 대구시 차원의 체계적인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최길영 의원의 문제 제기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지역 문화계와 석재 기념사업회 등에서도 더 이상 시간이 흐르기 전에 그의 작품 세계를 올바로 조명하고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 지역의 한 중견 화가는 "비록 나는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긴 하지만 대구시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대구의 자랑거리인 석재 서병오 선생"이라며 "왜 제대로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 전국적으로 차별성도 없고 시민들의 호응도도 낮은 이우환 미술관에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이동관기자 dkdk@msnet.co.kr 이재협기자 ljh200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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