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 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이 다 젖었다
-시집 『립스틱 발달사』(천년의시작, 2013)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점점 홍홍 흘러가는 걸로 봐서는 여름날인가. 모르겠다. 시의 분위기로 봐서는 사계절이 다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데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의 풍경인가. 이른 봄 해바라기하는 마음이 보이는 듯도 하고, 늦가을 밤 어디선가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시 어디쯤에선가 서릿발이 느껴지는 듯도 하고, 봄날 아지랑이 같은 숨결이 감지되는 듯도 하다. 계절은 무슨 소용. 다만 인연, 오는 것들을 맞이하는 설렘이 어떤 짧은 만남의 격렬한 파동을 거쳐 마침내 떠나가는 것들의 잦아듦이 처연할 따름이다.
사람의 발이 있기는 있는 걸까. 그늘을 따라 옮겨 앉는 일도 햇살을 따라 자리를 바꾸어가는 일도 다 헛된 것만 같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발이 없다. 결국 내려놓느니 마음이다. 은근 축축하다. 체감은 시리기까지 하다. 하긴, 사람 사이에 꽃잎이 지는데 봄가을을 가리겠는가 여름겨울을 나누겠는가. 불문가지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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