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⑭혼돈의 시대, 꺾이지 않는 신념

"외세에 아첨하여 나라의 독립을 그르치지 말라" 분기탱천

◆정무위원에서 민주의원으로

비상국민회의에서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임된 심산은 첫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최고정무위원은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기관이 아니라 미 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심산은 최고 영도자로 추대된 이승만과 김구가 민족의 반역자가 되려 한다고 분노했다. 하지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은 비상국민회의에서 일언반구 결의된 바가 없었다.

심산은 첫 회의에 불참했다. 백범에게도 회의에 참석하지 말고 대신 민주의원의 조직 경위를 밝히고 비상국민회의에서 위임한 사항을 실천하지 못한 점을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신탁통치 논란 이후 심산에게 있어 미국과 소련은 독립을 도와준다는 미명 아래 신탁통치라는 흉계를 꾸미는 외세였다. 당연히 미 군정청 자문기관이 심산의 시각으로는 찬탁의 선봉대로 나서서 민족을 팔아먹는 모리배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민주의원이 발표되고 하지와 이승만의 개회사와 식사가 중계됐다. 하지는 미 주둔군의 사명은 한국의 정부수립을 도와주는 데 있으며 이런 이유로 민주의원을 설치해 자문기관으로 갖추려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현 정세를 봐서 정부를 수립하는 여러 가지 절차는 미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김규식도 이승만과 비슷한 요지의 말을 했다. 그러나 백범은 비상국민회의에서 결의한 사항대로 최고정무위원 28인을 선정, 정부를 수립할 모체기관으로 갖추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산은 자서전에서 '이승만이 미국을 업고 정권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하려는 징조가 보인다'며 분노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무위원을 민주위원으로 탈바꿈시킨 이승만의 행위를 미국의 비위를 맞춰 민족을 팔아먹으려는 짓으로 본 것이다. 경교장에서 백범을 만난 심산은 "우남과 더불어 민족을 팔아넘기려 하느냐"며 "외세에 아첨하여 나라의 독립을 그르치지 마라"고 소리쳤다.

민주의원 회의에 이승만은 의장으로 임석했다. 조완구가 나서서 민주의원의 조직경위를 따졌다. 이승만은 답변을 거부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심산이 가세했다. 비상국민회의에서 위임한 사항은 어디에다 버려두고 국민을 기만하느냐고 따졌다. 답변을 거부하던 이승만은 심산의 추궁이 계속되자 회의장을 떠나고 말았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는 동지였지만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심산과 이승만은 더 이상 동지가 아니었다.

◆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윈회가 열렸다.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과 수립된 임시정부 참여하의 4개국 신탁통치협약 작성이 주 의제였다. 좌익진영은 미소공위를 환영했다. 미소공위가 임시정부를 수립해 남북통일을 가져올 것이며 통일정부의 주도권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적 지지가 높던 자신들에게 돌아오리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우익 진영에서는 신탁통치를 가져 올 미소공위를 우려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신탁통치 논란의 와중에서 좌우익의 관계는 더 이상 서로 공생할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적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군사령관 하지는 우익 인사들을 달랬다. 미소공위를 배격하고서는 정부수립이 어려울 것이라며 공위에 협력하라고 권유했다. 민주의원들도 연일 미소공위에 참여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하지의 주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백범은 탁치에 굴복하여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면 나라를 잃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심산과 백범의 만남이 잦아졌다. 비록 정세를 보는 견해가 완전히 같지 않았지만 나라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의에는 둘이 다를 바 없었다. 만남이 이어지면서 심산과 백범의 우정도 깊어갔다. 백범은 심산에게 민주의원에 나와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민주의원에서 세가 약해지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정도를 밝히는 데에 함께 노력하자고 했다. 백범의 고충 어린 권유에 심산은 다시 민주의원에 참석했다.

민주의원에 나선 심산의 머리에는 미소공위에 참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가득했다. 그에게 미소공위 참여는 곧 찬탁이며 이는 민족에 대한 반역이었다. 백범과 조소앙 조완구 정인보 등이 생각을 같이했다. 그러나 공위에 협력하지 않다가는 정권이 송두리째 좌익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격론은 계속됐다. 이때 하지의 성명이 나왔다. 공위에 협력하여 정부를 수립한 이후에도 신탁통치를 반대할 자유는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수의 민주의원들이 하지의 성명에 환호했다. 반탁은 하되 정부수립에는 참여코자 했던 그들에게 길을 틔워 준 것이었다.

그러나 심산의 눈에 하지의 말은 결국 미소공위의 결렬을 가져올 게 뻔했다. 소련사령관 스티코프는 분명히 찬탁자만이 공위 참여가 용납된다고 했었다. 심산은 미소의 견해 차이로 소득 없이 끝날 회의에 참여하다가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라고 꼬집었다. 백범도 가세했다. 하지의 말만 믿고 참여했다가 스티코프가 반대한다면 자승자박의 낭패를 볼 것이라며 공위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대의 앞에 떳떳함만 못하다며 공위 참여를 반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은 이미 참여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느냐는 말도 나왔다. 가부 표결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백범은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반탁을 관철하지 못하고 미소공위에 투항하려는 참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심정을 밝혔다. 모든 사람들이 훗날 반탁운동을 위해서도 사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말렸다. 백범의 사퇴 의사 철회 이후 곧바로 표결에 들어갔다. 출석의원 23명 중 찬성 22, 반대 1표였다. 반대표는 심산의 것이었다.

◆꺾이지 않는 신념

심산은 허탈했다. 독립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온 지난날이 헛수고로 돌아간 심정이었다. '슬프다. 내가 민주의원에 나간 것은 오직 백범과 협조함에 있었는데 지금 백범도 시속의 논조로 기울어졌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국제정세나 당시 남한의 사정을 들어 심산의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옹고집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국의 완전한 독립 앞에 심산은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대의에 어긋나는 일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신념을 꺾지 않은 그의 선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민주의원들이 공위 참여를 결정한 얼마 후 소련 사령관 스티코프는 정부수립 후에도 신탁통치를 반대할 자유가 있다는 하지의 말은 삼상회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반탁인사들은 공위 참여와 정부 수립의 자격이 없다고 배척했다. 심산의 예측대로 미소공위는 결렬의 수순을 밟아갔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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