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성폭행이나 묻지 마 칼부림, 넘쳐나는 불량식품, 청년백수, 직장인들의 고용불안, 중년층의 노후 불안까지…. 우리 사회가 온통 불안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불안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적 현상인 '불안'을 각종 마케팅에 동원하고 있다. 보험'사교육을 비롯해 치안 불안을 해결해줄 보안 관련 산업과 장래 불안 해소를 위한 자기계발, 코칭, 힐링 관련상품이 넘쳐난다. '막막한 노후, 아직도 준비 안 하셨나요?' 이런 광고를 듣고 불안하다면 '낚일'(?) 가능성이 100%다.
◆남의 불안이 나의 기쁨
지역 중소기업에 다니는 최용수(가명'44) 씨는 지난 주말 혼자 사는 80세 된 노모의 집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함께 식사를 하는데 된장찌개에서 주먹만 한 돌덩어리가 나온 것. '원적외석을 방출해 암을 예방한다'는 기적의 돌을 저렴한(?)가격에 구입했다는 노모의 설명이었다.
최 씨의 집에는 이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난다. 지나칠 정도로 건강을 염려하는 노모는 몸에 좋은 거라면 뭐든 사고 싶어 해서다. 얼마 전에도 집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노모가 자녀들에게 200만원을 호가하는 의료용 침대를 사야겠으니 돈을 보내라고 통고해서다. 최 씨 형제들은 돈도 부담스러웠지만 제품의 효능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모는 막무가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러느냐"며 고집을 피우는 노모를 말릴 수 없었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수정(42'여) 씨는 얼마 전 10년 넘게 부어왔던 보험회사의 연금보험을 중도 해지했다. 매월 100만원이 넘는 돈을 적립했지만 더 이상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중도 해지에 따른 손해는 엄청났다. 속이 상했지만 김 씨를 더 화나게 한 건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처럼 다른 보험사의 태도였다. 보험 가입을 권할 때 "100세 시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떻게 할 생각이냐"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해지할 때는 빚 받으러 온 사람 취급이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생명보험사, 손해보험사, 증권사, 은행 등이 '100세까지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앞세운 금융상품은 무려 200개에 육박한다.
치안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불안을 해소해 줄 보안 분야 수요도 크게 늘었다. 관련업계는 전체 보안시장 규모가 2011년 3조1천289억원에서 4년 후인 2015년에는 4조7천42억원으로 50% 이상 커질 것으로 추산한다. 그동안 건물이나 기업용 보안장치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가정용이나 모바일용 보안시장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보안솔루션 기업인 에스원은 지난해 하반기 혼자 사는 여성이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세콤홈즈'라는 상품을 내놓았다.
◆아이를 볼모로…
"여섯 살이라고요. 보통 서너 살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여섯 살이면 많이 늦은 셈입니다."
맞벌이 부부인 강미정(가명'35) 씨는 얼마 전 집주변에 있는 영어유치원에 상담을 하러 갔다가 '늦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100% 영어수업을 진행한다'는 이 유치원은 월 100만원이 넘는 학원비를 자랑하는 곳.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영어유치원에 다니면 1, 2년 후에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상담원의 설명에 등록을 마쳤다.
아이들을 볼모로 한 마케팅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불안 마케팅의 결정판. 노인들과 함께 불안 마케팅의 주요 타깃이다. '사교육 조급증' '학원 맹신주의'에 '불안심리'까지 겹쳐 초'중'고교 학생은 물론 유아를 둔 부모까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학원가를 서성거리게 한다. 영어 유치원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사교육업체들이 '당신의 아이만 뒤처지고 있다'며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선행학습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왕따) 등 청소년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일부 업체는 각종 기획행사를 마련하는 등 얄팍한 상혼으로 학부모들을 유혹하고 있다. 점집까지 가세했다. 대구 앞산에 있는 한 철학관. 풍수나 사주'수상'관상이 전공분야지만 요즘은 사설 학원 못잖은 상담을 해주고 있다. 이곳 주인은 "예전에는 주로 묏자리를 봐주거나 사주'관상을 봐주며 돈을 벌었지만 요즘은 진학상담이나 왕따 문제 등을 상담해 주고 있다"고 했다.
◆안심 마케팅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괜찮다'며 다독여 주는 안심 마케팅도 유행하고 있다. 불안 마케팅이 채찍이라면 안심 마케팅은 당근인 셈. 특히 직장인 가운데 고용불안과 미래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면서 자기계발, 힐링, 코칭, 멘토링 관련 시장도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취업준비생들도 심리적 위안을 얻거나 경기침체로 어려워진 취업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찾고 있다. 기자가 직접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힐링 또는 치유라는 주제어를 검색해보니 약 1천여 종의 책이 나타난다. 출판업계 관계자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을 편하게 하는 내용이라 주목받는다고 생각한다. 불안한 사회 속에서 위로받고 싶은 바람이 관련 책들의 폭발적인 판매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영풍문고 대구점 김근희 과장은 "최근에 나온 책들은 평범한 언어로 일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펼쳐놓으면서 불안한 대중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고 했다.
제품의 '속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일명 '누드 마케팅' 바람도 거세다. 일부 음식점들은 오픈 키친 전략으로 원료 준비부터 조리과정, 제품 포장까지 모든 단계를 소비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음식 프랜차이즈 업체인 '바뷔취' 이정희 대표는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만연한 분위기 속에 원재료 정보 공개는 물론 조리과정까지 모두 공개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는 소비자의 니즈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경산시 서부1동 '세남자의 이야기'와 진량읍 '복어세상' 등 일부 음식점들은 지난해부터 주방 공개용 CC(폐쇄회로)TV를 설치했다. 손님들의 불안을 원천 방지하기 위해서다. 음식점 주방에 CCTV를 설치해 손님들이 식사하면서 모니터를 통해 음식 조리과정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복어세상 이정재 실장은 "영업시간 내내 조리하는 모습 등이 실시간 방영된다. 손님들이 안심하고 음식을 즐길 수 있어 좋아한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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