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이야기의 교훈은 거북이의 근면함과 성실함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보니 의문이 든다. 과연 거북이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거북이의 승리 열쇠였는가? 그 이면에는 애초에 부당한 경기가 있었고, 그 경기를 방관하거나 혹은 오히려 부추긴 주변 동물들의 무책임한 사악함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토끼의 이기적이고 자기과시적인 교만함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토끼의 실수가 있었다.
애초에 거북이로서는 생태적으로, 환경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였다. 토끼에게 일방적인 경기 조건을 거북이는 왜 수용했을까? 약자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자 수용이었을 것이다. 거북이의 무모한 대결 의지는 그래서 안쓰럽고 처절하다.
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이길 게 뻔한 싸움짱이 약한 아이에게 일대일 맨손 대결을 신청한다. 그럴 때 힘없는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몇 가지나 있을까? 그 자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하며 헤어날 수 없는 종속의 처지로 스스로 떨어지거나 그 대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주위에서 싸움을 충동질하며 스스로 폭력적 주체와 동일시되어 야릇한 흥분에 들뜨는 다수의 방관자, 아니 조력자들은 그 시스템에서 중요한 가해자이다.
우화의 상황이, 학교 내 아이들의 폭력적 상황이 보여주는 불공정한 경쟁 구도는 언제나 있어왔다. 문제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 시대적 논리로, 합리적인 대안으로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끼의 부당한 대결 신청은 당당한 경쟁 원리가 되어 다수의 거북이들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게 만들고 그 패배의 책임은 고스란히 거북이에게 돌려진다. 그 시합의 부당함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주변 동조적 가해자들은 수수방관, 자신의 안위에 대해 오히려 만족해하며 공정한 시합의 필요성에 대해선 함구한다. 더욱이 지금의 토끼는 교만하나 나태하지 않다. 그런 토끼에게 거북이는 죽었다 깨도 이기지 못한다.
연말이면 수능 만점자의 자랑스러운 얼굴이 지면을 장식한다. 그중에 항상 가난을 극복한 사례도 소개된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다. 그 거북이에게 우리 사회는 무엇을 제공했는가? 그 아이의 처절한 노력을 우리 사회는 알고 있었고 지지해주었고 공정한 시합이 되도록 장(場)을 마련해 주었는가? 오히려 그 아이는 무수한 다른 거북이들을 게으르고 무능력하며 경쟁력이 없는 패배자로 만드는 데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용될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 수능만점자를 둘러싼 선정적인 언론 플레이가 물의를 일으켰다. 그 학생이 스스로 자신을 성공 미담의 주인공으로 만든 언론에 대해 "난 가난하지 않았고 지방의 영웅도 아니며 대치동을 격파하지도 않았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학교 교육에도, 사회적 관계에도, 정치'경제 논리에도 폭력적 토끼의 경쟁 원리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현금 국내 대학의 구조조정 역시 그러한 폭력적 경쟁 논리로 인해 혼란과 불신과 고통을 겪고 있다. 특히 지방 사립대에 불어 닥치고 있는 광풍, 그 시합에서 토끼는 누구인가? 그것은 지방 대학도, 경쟁력 없다고 퇴출대상에 오르는 학과도, 그 학과의 무능력한 교수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토끼의 야만적 승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약한 거북이들이다.
문제는 그 거북이가 제자들을 제대로 취업도 못 시키고, 들어온 학생들조차 붙잡아 놓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수업을 진행하는 경쟁력 없는 학과라고 평가되는 기초 순수학문의 학과 교수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놓고 해마다 노벨 문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난리법석을 떤다. 노벨상이 대단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의 수상 여부에 마치 국가의 가치와 미래가 걸린 듯이 호들갑 떨면서 경쟁력 없다고 퇴출시키는 그 이율배반, 그 폭력적이고 무능한 정책의 야만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대학에 불어 닥치고 있는 이 광풍에 자리하고 있는 폭력적 경쟁 논리가 우리 사회 전반을 오래전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지배해 왔음을 인식하고, 국가와 사회의 미래가 어떠한 합리적 논리 속에서 약속될 수 있는가를 정말 제대로 궁리해야 할 때이다. 폭력적 경쟁 논리가 극복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이호규 동의대 교수 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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