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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팥죽으로 서글픔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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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가 되면 절집에서는 불공을 한다. 팥죽을 쑨다 해서 무척 분주하다.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날을 기점으로 해가 길어지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이라 하여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설'에 '떡국'이, '추석'에 '송편'이 붙는 것처럼 '동지'에는 으레 '팥죽'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동지와 팥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연유는 이렇다. 고대 중국의 고사에 공공씨(共工氏)라는 사람이 못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다. 그 역질 귀신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쫓는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때 '지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선덕여왕을 얼마나 사모했던지 그의 몸이 점점 야위어 갔다. 어느 날 여왕은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지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불렀다. 여왕이 기도를 올릴 때 도착한 '지귀'가 여왕을 기다리다가 탑 아래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마침 기도를 마친 여왕은 자신의 금팔찌를 '지귀'의 가슴에 올려두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화귀(火鬼)로 변하였다. 지귀가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불을 지르자, 신라 사람들은 지귀의 행패를 막기 위해 팥죽을 쑤어 대문과 집 안 곳곳에 뿌렸다고 한다.

팥죽을 뿌리는 까닭을 음양오행과 연결지어볼 수도 있겠다. 빨강이 불이나 밝음을 상징하는데, 빛은 어둠을 몰아내면서 어둠에 깃든 삿된 기운이나 재앙도 물리치는 것이므로 새해 벽두에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먹고 주변에 뿌림으로써 새해에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절집에서는 이날 팥죽을 많이 끓여 두루 나눠 먹는다. 팥죽을 먹으려고 일부러 절에 오시는 분들도 많다. 더러는 집에 있는 가족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몫을 그릇에 담아가기도 한다. 우리 절에서는 5년 전부터 팥 여섯 말로 죽을 쑤어 우리 동네 홀몸어르신들께 두어 그릇 분량씩 갖다 드리고 절에 오시는 분들과 나눠 먹는다.

우리 절의 팥죽 끓이는 법은 이렇다. 죽 끓이기 이틀 전 찹쌀과 멥쌀을 각각 두 말씩 하루 정도 물에 담가뒀다가, 이튿날 떡집에 갖고 가서 빻고 반죽을 만들어 와 새알심을 빚어둔다. 이와 별도로 하루 전날 멥쌀 서 말을 깨끗이 씻어서 건져두고, 팥을 가마솥에 넣고 푹 삶는다. 팥이 흐물흐물해질 만큼 완전히 익으면 불을 끄고 솥뚜껑을 열어 완전히 식힌다. 첫해였던가, 뚜껑을 덮은 채 하룻밤을 둔 적이 있었는데 팥이 쉬어서 내버린 적이 있었다. 소량이면 금세 식지만 양이 많으면 주의해야 한다. 날씨가 따뜻하면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팥물 내는 법을 보면, 촘촘한 그물망 자루에 삶은 팥을 담고 풀할 때 밥주머니 치대듯이 계속 문지른다. 웬만큼 치대고 나면 맑은 물에 자루를 씻어서 속을 빼내는데, 그걸 서너 번 반복하여 팥 껍질에서 앙금이 완전히 빠지게 한다. 이렇게 만든 팥물에 미리 건져두었던 쌀을 넣고 바닥에 팥 앙금이 눌어붙지 않도록 저으며 끓이다가 새알심을 넣고 익을 때까지 계속 젓는다. 새알심이 충분히 익으면 불을 끄고 뜨거운 김이 빠지도록 어느 정도 식힌 다음에 배달할 그릇에 퍼 담는다. 스무날 전에 300가구에 김장을 해드렸는데 또 그만큼 팥죽까지 끓이려니 불자들의 노고가 여간 아니다. 아무튼 팥죽 한 그릇 쑤어먹으려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니까 몸이 불편하거나 연로하신 분들이 여간 해서는 마음을 내기 어렵다.

요즘 애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기성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해마다 "나이만큼 새알을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동지팥죽이 한 끼 밥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인이 동지팥죽을 못 먹었다는 건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니까.

기왕 팥죽을 쑤는 집에서는 좀 넉넉히 끓여 이웃에 사시는 홀몸어르신들께 한 그릇 대접하면 좋겠다. 팥죽조차 드실 수 없는 분들의 서글픔을 위로해 드릴 수 있도록. 팥의 붉은 기운에 선행공덕(善行功德)이 더해져 새해 액난이 피해갈지, 혹시 아는가.

한북/보성선원 주지 hanbook108@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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