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미즈사키 린타로와 수성못 왕버들

수성못 축조부터 새 단장까지 지켜본 나무

수성못이 새롭게 변했다. 신천의 물을 더 많이 유입시켜 항상 맑은 물이 유지되도록 하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가까운 곳에서 물을 볼 수 있도록 했으며, 독특한 수변 무대를 설치하고, 노랑꽃창포를 비롯해 다양한 식물을 많이 심어 경관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수질 정화에 도움이 되고, 새들의 서식처가 될 수 있는 인공식물섬이 당초 구상과 달리 배제되고, 창포 등 수생식물 식재가 미흡한 점은 아쉽다.

주변에는 맛있는 음식점이 즐비하고, 한때 요인들의 단골 숙소였던 수성관광호텔도 새로 꾸미고, 야간조명이 뛰어난 최첨단 음악 분수와 함께 볼거리도 다양해져 옛 명성을 회복하리라고 믿는다.

또 하나 기억해야할 만한 것은 못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산하수처리장의 넓은 녹지공간이다. 이 녹지는 주요 하수처리기능을 지하에 묻고 그 위에 녹지를 조성한 곳으로 대구시 환경시설의 관리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전국적인 모범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이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수성못을 보고 기뻐할 외국인이 한 사람 있으니 일본 기고현(岐皐縣) 출신의 미즈사키 린타로(水岐林太郞)이다.

그는 일본에서 촌장(우리나라 읍'면장)을 지내다가 1915년 개척농민의 일원으로 조선에 와서 대구에 정착했다. 수성들에 자리 잡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소출이 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가뭄으로 실농하는가 하면 홍수로 열심히 기른 농작물이 물에 잠길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조선 사람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저수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못을 만드는 일은 많은 돈이 드는 일이다. 그는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총독과 담판 끝에 이 일을 해냈다. 총사업비 1만2천엔(현 10억엔 상당)을 지원받아 10년의 공사 끝에 수성못을 완성했다. 수확의 기쁨은 자신도 즐거웠지만 조선의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39년 그는 죽음을 앞두고 '수성못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으며 한국식으로 무덤을 만들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타계했다. 살아서는 관리인으로 책임을 다하고, 죽어서는 못 지킴이가 되고 싶어 했다. 비록 일본사람이지만 지역의 농업발전과 농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이다.

세월이 지나 수성못의 기능도 당초와 달리 유원지로 변했다. 그러나 그때는 풍년의 기쁨으로 즐거웠고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만족하리라 믿는다. 한때 누군가 동쪽의 큰 왕버들을 '미즈사키 린타로 나무'라는 팻말을 붙여 기리더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 나무는 수성못의 축조과정으로부터 최근 새로 꾸미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다. 다시 팻말이 붙여지기를 기대한다. 수성못 하면 잊을 수 없는 또 한 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1970년대 초반 지산'범물은 거의 논밭이었다. 당시는 식량증산을 위해 정부가 전 행정력을 집중할 때였다. 따라서 농사에도 군사작전 개념을 도입해 소위 '영농시한작전'을 펼쳐 모내기는 늦어도 6월 25일까지 끝내도록 했다. 그러나 오랜 관습이 단시일 내에 바뀔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즘 대통령이 대구에 오고 혹 수성관광호텔에 자고 아침 일찍 옥상에 올라가 비어 있는 논을 보기라도 하면 지적받을 것이 두려운 시장을 비롯한 간부 공무원들이 쩔쩔맬 때였다.

그때 농산담당 공무원들은 수성못에 양수기를 설치하고 물을 펐다. 혹 기계가 고장 나거나 호스가 찢어질 것에 대비해 밤새 곁에서 지킬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물을 퍼서 논을 장만해 놓아도 농민이 나타나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었다. 다급해진 시장은 각 구청의 청소종사원들을 동원해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까지 모내기를 완료했었다. 쌀이 남아돌고 주변이 상전벽해로 변한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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