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한 극장업체가 내놓은 통계자료 하나가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국가라는 내용이다. 2013년 1인당 영화 관람 횟수가 평균 4.12편으로 추산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영화관 관객이 2억 명을 넘어섰다. 인구 수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시네마 천국'인 셈이다. 영화관에 가본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면 이번 주말에 연인이나 가족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는 건 어떨까? 겨울은 극장가가 연중 가장 붐비는 시기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관객 가운데 29.5%가 1'2월과 12월에 극장을 찾았다.
◆'시네마 천국' 대한민국…대구는 전국 4위
영화상영관인 'CGV'가 영국 미디어리서치회사 '스크린 다이제스트'의 자료를 분석,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들이 연평균 4회 이상 영화를 본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2위부터 4위를 차지한 미국(3.88편), 호주(3.75편), 프랑스(3.44편)는 모두 우리나라보다 적었다. 이 부문에서 한국이 세계 1위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극장업계의 외형도 크게 성장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관객 수는 2억1천330만5천여 명이었다. 이는 1억9천489만여 명을 기록한 2012년에 비해서 10%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한 해 영화 관람객 수가 2억 명을 돌파한 것은 미국'인도'중국'프랑스에 이어 다섯 번째다. 극장들의 전체 매출액도 1조5천510억여원에 이르러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대구는 지난해 관객 수와 매출액이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4위였다. 한 해 동안 한국영화 183편, 외국영화 468편 등 651편이 상영돼 관객 1천271만9천857명에 매출액 892억7천629만원을 기록했다. 경북은 377편(한국영화 120편'외국영화 257편)의 영화가 상영됐으며, 관객 630만8천889명에 매출 443억7천239만원으로 9위였다. 1위는 1천182편(한국영화 341편'외국영화 841편)에 약 6천8만 명이 입장, 4천602억8천497만원을 거둬들인 서울이었다.
한국 영화산업이 이처럼 놀라운 성적을 거둔 것은 다양한 영화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은 복합상영관이 1998년 등장하기 직전인 1997년의 1인당 극장 관람은 1편에 불과했다. CGV 측은 "과거 단관(單館) 시절에는 관객 100만 명을 동원하는 데 6개월이 걸리는 등 영화 관람 자체가 제한적이었지만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영화 관람이 일상적인 문화생활로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1인당 영화 관람 편수가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간 것은 국내시장이 포화단계에 달했다는 방증이란 시각도 있다. 대구 롯데시네마 아카데미관의 이석현 본부장은 "선진국의 경우 1인당 연간 관람 편수가 4편을 넘은 뒤 내리막길을 걸었다"며 "대구도 극장 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동시 상영'암표상은 추억 속의 풍경
대구시의 영화상영관 현황 자료에 따르면 대구에는 지난해 연말 기준으로 총 24곳의 극장이 있다. 심야상영은 아직 있지만 1980년대 미성년자들이나 백수들의 '해방구'였던 재개봉관, 동시상영관은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이들 극장을 말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비 오는 영화'(스크래치가 많은 화면)를 볼 일도 없다. 요즘에는 영화가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배급, 상영한다.
대구 전체 상영관 수는 모두 137개, 좌석 수는 2만2천549석이다. 상영관 수가 가장 많은 곳은 12개 관을 갖추고 있는 'CGV 대구'(1천625석)이다. 좌석 수가 가장 많은 극장은 1천987석인 '메가박스 대구'(10개 상영관)이다. 극장 가운데 '씨네팔공' '씨네스카이' '시네월드컵' 등 3곳의 자동차극장과 '동성아트홀' '동아아트홀' '북구 문화예술관' '시네마M'을 제외하면 모두 멀티플랙스이다. 브랜드별로는 CGV와 롯데시네마가 각각 7곳, 메가박스가 2곳이다. 대구 시내 극장 가운데 3분의 2가 대기업 계열 극장들인 것이다. 멀티플렉스가 대구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이다. '중앙시네마'가 첫 테이프를 끊은 뒤 하나 둘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내년 연말쯤 달서구 상인동에 롯데시네마와 CGV가 하나씩 더 문을 열 예정이다.
멀티플렉스가 일반화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영화 보기가 훨씬 쉬워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극장마다 상영하는 영화가 제각각이었지만 요즘은 어느 영화관을 가더라도 원하는 영화를 대부분 볼 수 있다. 또 같은 영화를 같은 극장 내 여러 개 상영관에서 트는 경우가 많아 굳이 시간대를 맞출 필요도 없다.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영화를 봤다는 남희철(43) 씨는 "예매를 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어 무척 편리해졌다"며 "신용카드 할인 서비스를 받을 경우 한 명당 5천원 정도로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 영화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다.
온 가족이 함께 가더라도 각자 취향대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다는 것도 멀티플렉스의 강점이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영화관에 간다는 주부 김민희 씨는 "남편과 아이들이 액션 영화를 볼 때 혼자 멜로 영화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함께 극장에 가지만 귀가할 때 추억은 서로 다르다"고 했다.
극장 편의시설이 개선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한 'MMC만경관'의 경우 15개 관 2천400석을 9개 관 859석 규모로 줄이면서 좌석 앞뒤 간격이 1.3m로 넓어지고, 의자가 30도가량 뒤로 젖혀지는 기능까지 갖췄다. 또 'CGV대구'는 4D'아이맥스(IMAX) 상영관이 있고, '롯데시네마 동성로'는 누워서 관람할 수 있는 '샤롯데관'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사라진 추억거리들도 많다. 암표상, 극장 간판, 영사기 기사, 검표원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대구 도심으로 가야 하는 일도 없다. 극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성서'율하지역 등 대구 부도심에 잇따라 극장들이 들어서면서 중구의 극장 비중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극장업계에 20년 정도 몸담았다는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명절 같은 대목이면 극장 앞이 장사진을 이루고 암표상도 흔했지만 모두 추억 속의 풍경이 됐다"며 "극장 하면 떠오르던 페인트칠 간판은 컴퓨터 출력 포스터로 교체된 지 오래"라고 말했다.
◆상업영화 일색, 획일화된 콘셉트 개선해야
멀티플랙스의 등장 이후 극장 관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영화 시장은 급성장했다. 특히 관객 증가는 영화 제작에 대한 투자 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형성, 국내 영화 제작의 수준도 높아졌다. 지난해 한국영화가 동원한 관객 수는 1억2천726만5천여 명으로 한국영화 관객 수 1억 명을 처음 돌파한 2012년의 1억1천461만3천여 명보다 무려 1천200만 명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멀티플렉스에서 개봉되는 영화가 상업영화 일색이어서 독립'예술영화를 찾는 관객들은 갈 곳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관람객 1천만 명을 넘거나 이에 육박하는 '대박'을 터트린 영화가 '7번방의 선물' '아이언맨3' '설국열차' '관상' 등 4편이나 나온 것도 이 같은 구조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방송학부 교수는 "영화 배급사가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하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철저하게 상업화되고 대중화된 영화만 내걸리는 구조에서 관객의 선택은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영화 시장이 성숙된 선진국처럼 예술적 가치가 있는 영화들을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영화예술 강국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기업 계열사 극장들이 지역에서 많은 수익을 내는 만큼 극장 시설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멀티플렉스들이 차별화된 콘텐츠와 세련되게 꾸며진 다양한 공간을 갖춘 '컬처플렉스'로 변신하고 있지만 지역은 여전히 '영화 보는 공간'으로만 남아있는 탓이다. 한국인이 대구에 세운 최초의 극장인 'MMC만경관'(1922년 건립)의 김장호 점장은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지역에는 크게 투자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차별화된 콘셉트가 사실상 유일한 경쟁 무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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