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순 교수의 이야기 콘서트]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05년 9월 30일, 브루엔 선교사 집 앞에는 뒷골목으로 빠져나온 한 금발의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몰려든 군중의 눈길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자신의 가마에 하녀를 대신 태워 길을 떠나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대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열흘 전쯤인 9월 19일에 미국의 '아시아 순방단' 일행과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서울로 향했다. 길가에는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앨리스(Alice), 바로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맏딸이다. 일본이 러시아 해군을 침몰시키고 있던 무렵,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딸을 포함한 대규모 순방단을 파견한 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손님에 놀란 고종 황제는 루스벨트가 고마웠다. 밀사를 보내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도와달라고 그토록 애원했을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드디어 '공주님'을 구원의 천사로 보내주시다니!

앨리스는 다음 날 홍릉에 자리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능(陵)을 방문했다. 어쩌면 일본에 당한 국치의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던 황실의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무례했다. 당시 황실의 의전을 담당하던 독일인 여성 크뢰벨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엄청난 먼지 폭풍을 일으키며 한 여성이 위세 당당하게 말을 타고 나타났다. 승마용 채찍을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우리는 황실의 격식에 따라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으나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장난으로 여기는 듯했다. 큰 코끼리 석상이 있는 것을 보더니 순식간에 올라타고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그녀의 그런 망나니 같은 짓에 경악했고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종은 그녀를 오찬에 초대했고, 나머지 일행은 작은 테이블에 한국 고관들과 함께 모셨다. 황제의 특명으로 처음 양복을 입은 관리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고 고종이 앨리스에게 베푼 환대는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공주님의 반응에는 오히려 비웃음이 숨어 있었다. "땅딸막한(squat) 황제께서는 식사하러 들어갈 때 자신의 팔을 내밀지 않고 나의 팔을 붙잡더군요. 황제와 마지막 황제가 될 그의 아들은 우리 공사관 곁에 있는 궁전에서 내밀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지요. 궁전을 떠날 때 그들은 각자 나에게 자기들 사진을 내밀었어요. 그 두 사람은 애처롭고 세상사에 둔감한 인물들이었으며 황실로서 그들의 존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황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앨리스는 두 달 전 7월 29일, 그들이 일본에 도착해서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이미 황실의 운명을 결정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의회의 승인도 없이 한국 땅을 일본 식민지로 승인하고 필리핀 땅을 미국이 차지한다는 약속을 태프트 육군 장관을 특사로 내세워 완료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당시 '앨리스 공주'로 불리며 매스컴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자기 딸을 앞세워 한바탕 쇼를 벌이듯 연막작전을 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루스벨트의 시나리오에서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던 고종 황제는 피에로 역을 맡았던 셈이다. 불쌍한 대한제국! 나라가 이미 남의 손에 의해 팔려버린 것도 모르고 한 말괄량이에게 농락을 당한 채, 두 달 뒤인 11월 17일에 결국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순방단은 9월 29일에 서울을 떠나 특별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홍수로 말미암아 철로가 끊겼고, 일행은 그날 대구에 내려 브루엔 선교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선교사들이 베푼 만찬에서 아이들은 앨리스가 중국 서태후에게서 선물 받았다는 애완견을 보겠다며 몰려들었다. 선교사 애덤스의 어린 아들 벤은 자기 강아지를 안고 나왔다. 강아지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앨리스에게 벤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테디(Teddy)예요!" 긴 정적이 흘렀고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앨리스의 아버지 루스벨트 대통령의 애칭이었던 것이다. 110년 전, 초대받지 않은 손님 앨리스 공주는 졸지에 '개의 딸'이 되어 대구를 도망치듯 떠나갔다.

계명대학교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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