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석(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대표가 만드는 광고는 단순하다. 무뚝뚝한 대구 남자의 감성이 광고에도 담겨 있다. 사실 그의 광고는 말보다 한 방의 '그림'이다. 단순한 비주얼로 모든 사람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광고를 만드는 것이 이제석 스타일이다. 그의 광고 화법은 전 세계에 먹혔고, 세계 유명 광고 공모전을 싹쓸이했다. 잘나가는 스타 광고인은 지금 한국으로 돌아와 돈 안 되는 공익광고를 만들고 있다. '광고로 애국하겠다'는 신념을 실현한 것이다. 지난달 14일, 서울역의 한 커피숍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 광고로 '애국'하는 남자
'애인꺼 살 때 아빠꺼도 챙겨라. 삐진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밸런타인데이였다. 날이 날인 만큼 이 대표가 만든 수많은 광고 중에서 공정무역 초콜릿 광고 카피가 생각났다. "광고는 압축의 예술입니다. 서술형이 돼서는 안 돼요. 짧은 시간에 많은 의미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명료해야 합니다." 그는 광고를 단숨에 정리했다. 작품만큼 실제 모습도 투박했다. 벙거지 모자와 검은색 점퍼, 청바지와 운동화. 멋 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대표는 "현장에서 일할 때 입는 옷 그대로 입고 온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이 대표는 세계가 인정한 '광고쟁이'다. 생각을 뒤집는 광고로 미국에 간 뒤 6개월 만에 광고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가장 먼저 상을 탄 것은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고발한 '굴뚝총' 광고. 세계적 귄위를 자랑하는 '원쇼 칼리지 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는 광고도 마찬가지. 군인이 겨눈 총구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전 메시지 광고는 국제 광고 공모전에서 10여 개의 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돈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는 광고판에서 이제석은 가치를 다른 곳에 뒀다. 가구와 신발, 과자 광고를 할 때 느낄 수 없는 뿌듯함을 공익광고를 하며 맛본 뒤, '섬 도둑질 그만'(STOP ISLAND THEFT) 이라는 설치물을 만들어 뉴욕 맨해튼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게릴라 퍼포먼스도 벌였다.
그는 상업광고는 '예산의 판'은 크지만 '생각의 판'이 작다고 설명했다. "상업광고로 혜택을 받는 사람은 소비자에 한정돼 있죠. 마켓(시장) 크기는 상업광고가 크지만 파장 효과는 공익광고보다 적어요. 예전에 자살 예방 광고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이 광고를 보고 자살 예방 상담 전화가 많이 들어왔어요.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 10명이 이 광고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면 자동차 10대를 판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생각의 판을 넓히기 위해 그는 '이제석광고연구소'(이하 이제석연구소)를 차렸다. 이곳에서 제작하는 광고 80% 이상이 공익광고다. 밤잠 설쳐가며 범인과 씨름한다는 의미로 서울 강남 경찰서에는 부엉이 벽화를 그렸고, 부산에는 '총알같이 달려가는 경찰'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진짜 차를 광고판에 끼워넣었다. 상업광고를 할 때는 '아이디어비'를 3천만원 이상 받지만 공익광고에서는 아이디어비가 제로다. 이 대표는 "공익광고는 없는 판을 만드는 것"이라며 "공무원들이 홍보 예산을 올릴 때도 아이디어는 '결제 대상'이 아니니까 재능 기부를 한다. 아이디어비를 받지 않아도 공익광고할 때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고 웃었다.
◆'스펙'보다 '자기 브랜드'가 중요
지금 스타 광고인이 된 이 대표가 혼자서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 있어야 제자가 있는 법이다. 이 대표의 재능을 찾아준 것은 대구 미술학원의 한 선생님이었다. 공교육이 아니라 돈 내고 간 학원에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을 만난 셈이다.
"제 광고 인생에서 터와 초석을 닦아주신 분이에요. 그분은 '초야에 묻힌 고수'입니다. 광고에서 시각 언어 화법과 여백의 미, 크기 서열 등 기본을 다 이분에게 배웠습니다. 스승의 조건은 사랑입니다. 기술보다 마음을 전해줬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습니다."
계명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해 4.5점 만점에 4.47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광고에 삶을 '올인'했지만 한국 사회는 실력 대신 간판을 봤다. 졸업 뒤 수십 군데 지원서를 냈지만 부르는 곳이 없었다. 세계 광고 시장에서 인정받자 한국 회사들은 그의 실력을 뒤늦게 인정했다. 출신 대학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 이 대표는 일침을 가했다.
"광고쟁이 입장에서 '스펙 집착'은 자기 중심적이지 못하다고 봅니다. 스펙에는 대학뿐 아니라 사는 곳과 ○○기업 사원증 배지, 차 모두 포함되죠. 사람들은 스스로 당당하지 못할 때 명품 가방이나 다른 브랜드를 빌려 자신을 포장합니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있으면 이런 게 다 필요 없어요. 저는 미국 회사에서 일할 때부터 회사가 브랜드가 아니라 '나'라는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갑자기 신고 있던 흰색 운동화를 벗어 보였다. "보세요. 나이키 짝퉁 운동화예요. 3만원짜리지만 나이키라는 브랜드보다 '이제석이 신은 신발'이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국가가 최고 클라이언트(고객)'
항상 '틀을 깨는' 이 남자가 요즘 자주 만나는 고객들은 '틀에 맞춰 움직이는' 공무원들이다. 공익광고를 만들다 보니 당연한 일. "방식은 다르지만 내가 광고하는 이유와 공무원들이 일하는 이유는 '다 같이 잘살자'는 신뢰를 바탕으로 해요. 뜻만 통하면 됩니다. 정치색을 떠나서 국가가 제1의 클라이언트(고객)입니다."
대구 남자인 이 대표는 지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때 홍보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구 곳곳에 역동적인 선수 모습을 담은 광고를 제작한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대구가 바뀌어야 한다는 식상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의 초점은 대학을 향했다. 이 대표는 "대구를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바라보기 나름이다. '대구'라는 글씨를 봐도 받침 없이 직선만 있다. 보수가 가진 의미를 잘 활용하면 된다"며 "변해야 하는 것은 대학이다. 지역과 한국에서 대학 경쟁력을 논할 것이 아니라 기준을 세계로 잡고 준비해야 한다. 세계 경쟁력을 갖추면 전 세계에서도 학생이 몰려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유명인사가 된 이제석을 부르는 곳은 많다. 하지만 그는 "자리가 싫다"고 딱 잘라 말했다. 설치 광고물을 만들 때 이 대표는 항상 현장에 가서 목장갑을 끼고 직원들과 함께 일한다. 철골 작업과 용접은 물론 크레인도 조종한다. 수평적 위치에서 같이 일하는 리더가 이 대표가 바라는 모습이다.
"대학 사회에서 교수는 신선 같고 학생은 지옥불에 타는 거지 같습니다. 교수는 신분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직장인인데,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은 취업입니다. 그만큼 교수와 학생 사이에 괴리가 큽니다. 학교에는 학생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와야 합니다. 미국 대학에서 일흔 살인 학장이 전시실에 와서 손수 못질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 자리에 오면 편히 쉴 수 있다'가 아니라 '내 자리에 오면 열심히 할 수 있다'를 보여준 겁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세 살. 앞으로 갈 길이 더 먼 이 대표는 평범한 광고 회사를 넘어서는 연구소를 계획 중이다. 그는 "단순한 광고 회사를 넘어서 정책자문기관, 교육 역할까지 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끝내며 이제석 인생의 최고 가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인생은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예요. 사는 것이 좋은 거고 죽는 것이 나쁜 거잖아요.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라이프'(생명)예요. 광고쟁이가 광고로 살릴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공익광고고요. 앞으로도 계속 할 겁니다."
글'사진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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