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 거인(巨人)에게 길을 묻다] 제2부 호암 이병철 3)배려의 리더십…직원이 첫 번째

공장보다 먼저 지은 근로자 기숙사…최신식 시설 이화여대에 버금가

"일하는 환경이 나쁘면 작업에도 싫증을 느끼기 쉽고, 이 때문에 능률이 저하되거나 직장을 이탈하기도 쉬워진다. 그것은 바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누구나 웃는 낯으로 즐겁게 일할 수 있을 때 능률도 오르고 또 직장에 대한 애착도 생긴다. 그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사회에 대한 봉사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곧 여직공들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낮아지고 원가도 따라서 낮아지는 것이다" (1976년 6월. 서울경제신문에 실린 호암의 '재계회고')

호암은 '사원복지'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인 1950년대부터 작업환경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종업원들에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경영자의 책무라고 봤다. '배려하는 경영자'. 호암은 젊은 시절부터 이것을 목표로 뒀다.

◆호암의 경험

호암은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큰 충격을 받았다. '여공애사'(女工哀史)라는 책 때문이었다.

호소이 와키조(1897~1925)가 쓴 이 책은 1925년 출간됐는데, 당시 일본 내 공장에서 근무하던 생산직 여직원들의 참혹한 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공장 여공들은 새벽 3시 30분에 직장으로 출근, 오후 6시까지 무려 14시간 30분이라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오후 6시, 일이 끝나고도 가로 90㎝, 세로 180㎝밖에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몸을 눕혀야 했다.

끼니를 비료용 생선으로 때우는 이들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가혹한 노동과 형편없는 식사, 좁고 불결한 잠자리, 그들 대다수가 폐병에 시달렸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여공애사를 쓴 작가도 14세 때부터 공장 직공으로 일했고 제대로 먹지 못해 책이 출간되던 1925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부잣집 아들로 엄청난 거금이 들어가는 일본 유학길에까지 오른 호암에게 '여공애사'는 충격, 그 자체였다.

호암은 스무 살 일본 유학시절, 노동현장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고, 이때의 경험을 평생 자신의 경영 현장에 적용했다.

◆호암의 황소고집

호암은 1954년, 대구 침산동에 제일모직을 세웠다. 1950년대 공장이라고 하면 생산시설 이외의 다른 부대시설은 염두에 두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호암은 달랐다. 그는 공장을 지을 때마다 사원복지시설을 생각했다.

"공장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기숙사부터 먼저 짓고 정원까지 꾸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들 합니다. 기숙사에 스팀 난방시설을 한 것도 그렇고, 복도에 회나무를 깔고 목욕실에, 다리미실까지, 너무 많은 돈을 들인다고 합니다."

대구 조선양조 시절부터 호암과 호흡을 맞춰온 창업공신 이창업 전무는 제일모직 창립 초기 호암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공장 설립 초기 자금이 달리는데 복지시설 만들기에 경비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건의였다.

"이 전무, 나는 여직원들에게 단순히 직장만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들의 몸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오. 여직원들에게 먹고 잘 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숙사 생활을 통해 그들의 교양을 높이고 정서도 기르면서 이 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공장생활이라는 것이 매우 단조로운 일이다 보니 자칫하면 여직원들의 정서가 메마르고 정신건강도 좋지 않아져요. 그래서 기숙사 시설을 최신식으로 꾸미는 겁니다."(호암)

"기숙사면 됐지. 정원을 만들고 꽃을 심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사치고 낭비라고 합니다."(이 전무)

"돈이 들긴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그게 다 사회에 대한 봉사가 되는 거요. 여직원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싸질 것이고 제품의 생산원가도 낮아질 것이 아니겠소? 모직은 고가의 제품이요, 만드는 사람의 자질이 뛰어나고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우도 최고로 해주어야 하오."(호암)

호암은 창업공신의 만류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일대학' 학생들

호암의 '고집'으로 탄생한 제일모직 기숙사. 이곳은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숙사였다. '진심'숙심'선심'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숙사 3개동 주변은 꽃과 나무로 가득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가족들이 면회 오면 여직원들은 정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따로 있었고 전속 사진사도 있었다.

건물 안에는 미용실'세탁실'목욕실'다리미실'도서실 등이 갖춰졌다. 목욕탕은 24시간 개방됐고 한꺼번에 200~300명이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였다.

방에는 스팀 난방이 들어왔다. "이화여대 기숙사 다음으로 잘 돼 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래서 제일모직 기숙사는 '제일대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최고'라는 소문이 나면서 '제일대학'에는 손님들의 방문이 잇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7년 10월 말 국방부 장관, 미 극동군 사령관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장실을 보면 굳이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며 깨끗하게 개조된 수세식 화장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수세식 화장실은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나 볼 수 있었다.

5'16이 터진 1961년 늦가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문했다. 검은 안경을 끼고 기숙사를 천천히 둘러보던 박 의장은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어"라며 흡족해했다.(1956년부터 1962년까지 기숙사 사무실에 근무한 권길희 씨의 회고 중에서)

'최고의 공장'으로 알려지면서 대구의 제일모직 생산직 모집 공고가 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호암은 언제나 사원복지의 최우선은 '급여'라고 했다.

권길희 씨의 회고를 보면 당시 제일모직 처녀 가장들은 자신의 월급으로 동생 3명의 학비를 대고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다.

"종업원의 생계 대책에 대해 늘 경영자는 생각해야 한다. 종업원들이 애사심을 갖고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방법은 그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교육으로, 그들을 가르쳐서 훌륭한 사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1980년 12월 22일, 삼성그룹 정례 사장단 회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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