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필- "김밥, 사서 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이원선(대구 수성구 수성로)

내 어릴 적 김밥이란 이밥에 소고깃국만큼이나 로망의 음식이었다. 그 시절 얼굴 하얀 아이 하나가 전학을 왔다. 점심으로 싸온 도시락에 지금껏 풍문으로만 듣던 김밥이란 것이 새까만 망토를 걸치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주위 친구들이 금세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저 맛이라도 보고픈 마음에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웅성거렸다. "그래 맛이나 봐!" 하고 인심 좋게 내민 도시락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미처 손길이 닿지 않아 입맛만 다신 아이들의 힘 자랑(?)에 교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다음날 얼굴 하얀 애를 제외한 모두는 운동장에서 담임 선생님의 노여움 속에 기합이 끝날 줄 모랐다. 알고 보니 그 얼굴 하얀 애는 새로 부임해온 면장집 딸. 전학 온 첫날부터 얼굴에 난 생채기를 본 면장님이 노발대발, 결국 교장 선생님을 거쳐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을 나선 결과였다.

이후 장가를 들고 아들이 자라 소풍을 가자 아내는 온갖 정성을 들여 김밥을 싼다.

꾸덕꾸덕하게 밥을 짓고 단무지, 햄, 당근, 시금치, 계란 지단 등으로 속을 만들어 조그마한 대발에 넣어 둘둘 말더니 "어머나 옆구리가 터지네!" 라는 탄식 몇 차례에 기술자가 다 된다. 그 모습을 보며 군침을 흘리다가 은근슬쩍 꼬랑지 하나를 입에 넣어 오물거리면 "애들 것도 모자란다"며 핀잔을 주다가는 인심 쓰는 척 한 줄을 썰어 쟁반에 담아 무릎 아래에 슬며시 밀어 놓는다. 정성과 손맛이 들어가서인지 그 김밥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요즈음은 그 귀하디 귀한 김밥이 길에 널려 천지다.

그런 기억에 아내에게 내일 산에 가는데 김밥 좀 말아 달라고 하자 "그냥 사서 가!"라며 도리어 큰소리다. 그날도 김밥 말아달란 말은 입 밖에도 못 내고 새벽녘 김밥집에 들어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두 줄!" 하면 만사 휴! 막 문을 나서려는 찰나 머리가 희끗희끗한 내 또래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와 세 줄이면 거스름돈이 1천400원인데 2천600원을 받았다며 계산을 맞춘다. 모른 체 그냥 갔을 법도 한데 참 경우 바른 분이란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멀어져가는 그분의 뒷모습에서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얼굴 하얀 그 애가 본인 도시락은 매양 친구들에게 적선하고 입안에서 까칠한 노란 조밥에 찬으로 군둥내 물씬 풍기는 김치가 뭐에 그리 맛있다고 입맛을 다시던 모습이 노랗게 오버랩된다.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국민의힘이 6·3 지방선거 대구시장 공천 방식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으며,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공천이 시도되자 지역 정치권에서 '민주정당이...
구미 부동산 시장에서는 비산동 6-2 부지에 최고 46층 규모의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현재 구...
서울중앙지법은 화장실에서 빨리 나오라는 동생을 살해한 40대 남성에게 징역 10년과 치료감호를 선고했으며, 동생은 퇴근 후 목욕 중 불평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 한국과 일본을 언급하며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군사 작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며 파병 압박을 가했으나, 주한..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