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리던 때의 이야기다. 노트북을 사려고 전자매장을 찾았다. 자랑스러운 금메달리스트들이 TV화면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매장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직원이 다가와 특가 혜택이 있는 노트북을 소개했다. 이상화 선수의 금메달 획득을 기념하여 30만원을 지원해주는 축하 이벤트였다. 구미가 확 당겼다. 한편으로는 내일 있을 김연아 선수의 피겨 경기가 마음에 걸렸다. 하루쯤 기다려 보는 것이 나으려나? 고별 무대라 지원금이 더 많지 않을까? 알량한 갈등과 욕망을 누르고 노트북 구입에 주사위를 던졌다. 물품은 며칠 후에 받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을 새워 기다리던 새벽 4시가 지났다. '아디오스 노니노'가 빙판 위에 깔리면서 요정처럼 눈부신 은반 위 여왕의 연기가 펼쳐졌다. 온 식구가 김연아의 연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것은 분명 금메달감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심사 결과는 은메달이었다. 눈을 비벼 보아도 틀림없이 은메달이었다. 온 가족이 충격에 휩싸여 분노하는 사이 나는 가만히 방을 빠져나왔다. 노트북 만세!
며칠 후 매장에서 노트북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매장에 가니 직원은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더 싼 가격으로 노트북을 구입하려고 돌아간 고객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며 '고객님은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치켜세웠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국가의 명예가 걸린 김연아 선수의 우승이 어찌 하찮은 노트북에 견줄까마는 선택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안고 매장을 나왔다. 산들바람에 실린 이른 봄볕이 오늘따라 상쾌했다. 심사위원의 판정 시비와 은메달의 아쉬움은 소시민의 작은 이익 앞에 잠시 힘을 잃었다. 손에 든 노트북이 횡단보도의 녹색신호를 받으며 흔들흔들 춤을 추는 걸 보며 나는 힘찬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박미정(대구 남구 대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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