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500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서조(瑞鳥)가 다시 날개를 퍼덕이고 신라의 무사가 깨어나 말을 달린다. 천마총에서 발굴되어 이번에 공개된 채화판(彩畵板) 이야기이다. 1973년 천마총에서 발굴한 채화판 두 매를 41년 만인 지난 3월 17일에 공개했다. 거의 유일한 신라시대 회화 자료인데다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보관만 해오다가 최근에 자신감이 붙어 복원한 것이리라.
발굴할 때 이 채화판은 부장품 곽 속 천마도 말다래 아래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다래처럼 이것 역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피륙, 가죽, 인골 등은 다 썩어 자취도 없는데 이것이 1천500년을 훌쩍 뛰어넘으니 신(神)의 선물이 아닌가. 이 채화판은 자작나무 껍질 두 장을 겹쳐 가장자리를 꿰맨 부채꼴의 조각을 6, 8장을 잇대어 만든, 운두 없는 밀짚모자 같은 모양이다. 이 채화판은 자세히 보면 안쪽 가장자리가 약간 들려 있어 아마도 가죽이나 천으로 운두를 만들어 세웠을 것이다. 갓처럼 말이다.
원래 이 두 매 중 위에 있었던 서조 그림의 채화판은 여섯 개 조각을 잇대었는데, 그 각각의 부채꼴 안에 주작(朱雀) 같은 서조를 한 마리씩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은 두 쪽뿐인데, 한쪽은 토끼 머리를 한 주작이고, 다른 쪽은 봉황 머리를 한 주작이며, 둘 다 날개를 한껏 펼쳐 막 날 듯하다.
주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많이 나타나는 사신(四神)의 하나로서 대부분 닭 머리를 하고 있다. 토끼 머리는 특이하며 또 그 표정이 또 매우 영리해 보여 이 새는 인간에게 지혜를 가져다주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전해 주는 신조(神鳥)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서조에서도 우리는 신라인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이 새는 머리 위와 꼬리 위에 신기한 기관 즉 긴 연통 같은 것이 붙어 있고, 그 끝에는 화염이나 열을 뿜어내는 통풍구 같은 장치가 달렸다. 머리, 몸통, 꼬리, 날개 등은 붉은색으로 채색하되 가장자리는 비워 뒀지만 이 기관만은 다른 부분과는 달리 전부 붉은빛이다. 그만큼 불로 달아 있다는 뜻일까. 요컨대 이 새는 '불새'로서 인간에게 불과 열을 전해 주는 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주작은 사신 중에서도 남쪽을 수호하는 신으로, 오행 중에서는 불의 속성을 지니며, 계절 중에서는 여름을 관장한다고 한다. 인간의 취사용 불, 화재나 재앙의 불, 혹은 여름의 뙤약볕도 이 새의 통풍구에서 나오는 불이 아닐까. 이 새도 삼족오처럼 해를 먹고 그 불을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채화판에는 백마를 탄 젊은 무사가 달리고 있다. 말은 검은 꼬리를 수평으로 날리면서 앞 뒷발 모두 모둠발로 내닫고 있어 나는 듯하다. 특히 그림 아래위로 하얀 구름, 아니면 하얀 새가 그려져 있어 더욱 그렇다.
이 무사는 짙은 머리숱, 시커먼 눈썹, 우뚝한 코, 그리고 하관이 퉁퉁한 얼굴이며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뒤로 넘겨 묶었지만 그 머리채 또한 바람에 날린다. 강한 남성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흰 저고리에 검은 바지를 입었는데 상하의는 모두 풍덩하다. 활을 오른쪽 어깨에 걸고 엉덩이 쪽에 화살이 꽂혀 있다. 등자에 꽂은 발은 최대한 앞으로 내질러 성급하게 내달으려는 힘을 보인다. 필선은 굵고 가늚의 묘를 살리되 거침없어 무사의 활력이 한껏 묻어난다. 이 말 달리는 장면은 천마총 피장자의 삶의 한 단면이 아닐까.
천마총 유물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채화판' 본래의 이름과 그 특이한 서조의 이름도 찾을 길 없다. 그냥 '주작'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 같다. 금관에 붙은 장식물의 이름도 다 잃어 버렸다. 그 장식물만큼이나 예쁜 신라시대 이름이 있었겠지만 일본인들이 '곡옥'(曲玉), '영락'(瓔珞)이라고 불렀다. 민망해서인지 최근 '굽은 옥', '달개'라고 이름을 바꿔 보지만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늘과 소통하는 신성한 왕권을 암시하는 제의적인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박재열/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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