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내 사랑 밀양

김남희
김남희

날씨의 선물일까.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다. 혈관까지 젖는 기분이다. 가슴에 싱그러운 물기가 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꿈틀거렸다. 몇 주 전, 밀양에서 주최하는 미술실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분명 미술실기대회는 야외에서 치르는 행사이기에, 오늘 내리는 단비가 반갑지만은 않다.

'햇볕'의 대명사인 밀양은 비의 사정거리 밖이라는 점에서 오던 비가 멈출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고, 차창이 하염없이 비에 젖고, 내 추억도 젖는다.

대학교 1학년 초봄이었다. 미술학과에서 첫 야외 스케치를 갔던 곳이 밀양이다. 그때는 모두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입생들끼리도 서먹서먹했다. 사교성 부족으로, 나는 표충사에서 스케치를 하고 경내를 어슬렁거렸던 것 같다. 그 시절 표충사는 아주 고즈넉한 사찰로 고풍스러우면서도 신비로웠다. 햇살이 참 반짝였다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추억을 대신한다. 몇십 년이 흘러 내가 실기대회에 참가한 꿈나무들의 그림을 봐주러 갈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도착해서 보니, 야외공원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잠깐 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행사 담당자가 전화로 장소 변경을 알렸다.

실내체육관에는 이미 많은 참가자가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행사 관계자들은 우천으로 인해 행사장을 옮긴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란다. 그러나 실기대회에 참석한 아이들의 눈빛은 반짝였다. 초'중등 대상의 미술실기대회인 만큼 학부모들도 따라왔다. 미술실기대회가 즐거운 가족행사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돗자리를 펼치고 그림 그릴 준비에 들어갔다. 하나같이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문득 전율이 돌았다. 그들이 바로 미래의 예술가들이다.

미술실기대회는 가족과 지역의 축제였다. 아이의 손에는 이미 풍선이 쥐여져 있고, 아빠는 도시락과 음료수, 과일 등 맛있는 음식 보따리를 들었다. 엄마는 유모차를 끌며 그림 도구를 챙겨 들었다. 행복한 풍경이다. 모처럼 나선 가족나들이가 비 때문에 다소 움츠러든 감이 있지만 이 또한 귀한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대회가 무사히 끝나고, 심사까지 마쳤다. 관계자는 "미술실기대회 참가자가 매년 줄어든다"고 말한다. 돈보다는 꿈을 좇는 화가의 길이 무슨 인기가 있을까만. 그럼에도 나는 화가가 좋다. 비가시적인 세계를 탐하고 자연과 벗하며, 인생을 깊고 넓게 보는 사람. 그렇게 거창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에서 화가의 길은 생의 전부를 걸 만하다. 나에게 화가의 씨앗을 품게 해준 밀양이 새삼 고맙다. 이번 봄비는 유난히 달았다.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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