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수절(守節)

미당 서정주의 산문시 '신부'는 여인의 정절을 다뤘다. 신혼 첫날밤 신랑의 오해로 소박을 맞은 신부가 초야(初夜)의 모습 그대로 귀밑머리만 풀린 채 앉아 있다가, 40~50년이나 지난 후 궁금해서 들른 신랑의 안타까운 손길이 닿자 비로소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내용이다.

수절을 미덕으로 삼았던 한국 여인의 애틋한 삶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이 시는 유교적 열녀의 이미지를 신화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조선시대 여성의 정절(貞節)은 남성의 충절(忠節)과 더불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적 규범이자 인간적 덕목이었다.

일제강점기 임방울 명창이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국권회복을 위한 충절의 시대적 요구와 함께 춘향의 정절에 대한 민중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이미 '열녀함양박씨전'에서 은근히 지적했듯이 수절이란 성리학적 우주론이 지배하던 유교 사회에서 사회화되거나 제도화된 것으로 여성의 삶에 대한 억압이자 굴레라는 비판 또한 없지 않았다.

소위 서구화된 우리 사회에서는 폐기처분된 낡은 규범이자 덕목이 된 지 오래이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의 결백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숭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현충일(메모리얼데이)에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6'25전쟁에 얽힌 간절한 사연을 소개했다. 96세의 흑인 할머니 클라라와 남편인 고(故) 조셉 중사의 러브스토리였다. 꿈같은 신혼 중 한반도 전쟁 참전을 위해 떠나던 남편은 "만일 내가 전사하면 다른 사람과 재혼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노"(No)라고 고개를 저으며 "다른 사람과 결혼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셉은 전사자 유해가 되어 63년 만에 돌아왔고,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며 끝까지 집을 지킨 백발의 부인이 이를 맞이한 것이다. 대통령이 수절 과부인 클라라를 소개하자, 국립묘지에 모인 청중들은 30초가 넘는 긴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수절이 조선시대 사대부가 아녀자들의 덕목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바마 대통령의 말마따나 한 여성의 정절에서도 국가와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저력을 목격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