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서구 지킨 '영남이용소'
하양, 파랑, 빨강의 3색이 돌아가는 이발소 간판과 동네 남자들이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른 뒤 세면대에 머리를 숙이고 감는 모습은 얼마 전만 해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텁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한 사람도 이발소에 들어갔다 나오면 말쑥한 신사가 돼서 나오곤 했다. 지금은 남자들도 미장원에서 커트하는 시대지만 이발소는 아직도 장년층 이상의 남자들에게는 사랑방과도 같은 곳으로 남아있다.
◆의자도 세면대도 그때 그대로
'영남이용소'는 대구 서구 평리5동의 한 주택가에 31년째 자리하고 있다. 빛바랜 '영남이용소'라는 간판은 이 이발소가 동네의 터줏대감이었음을 알게 해줬다. 이발사 변인규(72) 씨는 "처음에는 평리3동에 문을 열었는데 그때 상호는 '인성이용소'였다. 그때가 아마 1969년이었을거다"고 했다. 서구에서만 40년 넘게 이발 일을 해온 셈이다.
이발소 안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옛날 이발소 모습 그대로였다. 이발의자 4개와 거울, 그 앞에 놓인 빗과 가위들도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바리캉이라 불리던 옛날식 이발기는 없고 전기 이발기가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면대의 타일도, 머리를 감길 때 쓰던 물뿌리개도 예전 모습 그대로다. 변 씨는 "한 번 시설을 바꾸려고 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결국 시기를 놓쳐버렸다"며 "'올해만 하고 그만해야지'하면서 계속 하다 보니 벌써 30년 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
한동네의 오래된 가게는 동네의 역사를 품고 있다. 영남이용소 또한 그러했다. 영남이용소의 전성기는 서대구공단, 이현공단, 3공단 등 서구 주변 공단이 활성화됐던 시기와 일치했다. 오전에는 어르신들이, 저녁때는 공장 근로자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동네 주변 공장들이 점점 외곽지로 옮겨가고 동네 젊은이들도 그때 번 돈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이발소를 찾는 손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요즘 오는 손님들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어요. 젊은이들도 한때는 많이 보였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더군요. 길거리에서 우연히 단골이었던 청년을 만났는데 이미 아파트 있는 다른 동네로 이사 갔다 하더구만요. 애들 소리도 사라지고, 주차 문제로 목소리 세우는 사람도 사라지고 저와 몇몇 분들만 동네에 남아있지요."
남자들이 이발소 대신 미장원을 찾는 요즘의 흐름도 이발소 운영이 어려워지는 원인이다. 변 씨는 "예전에는 이발소에서 예술적으로 이발과 면도를 한 뒤 포마드를 바르고 드라이를 해 멋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장원에서 커트한다. 변 씨는 "이런 흐름에 대항해 보려고 이발업계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기는 힘들더라"며 "시대 흐름이 그렇게 변하는 걸 어찌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변 씨는 "동네에 자주 오던 손님이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이면 대부분은 '돌아가셨다'거나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그럴 때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발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추억 남기기 50년 '세븐 사진관'
사진은 순간을 기록한다. 세상이 변해도 사진 속의 순간은 변하지 않고 추억과 감정이 그대로 박제돼 있다. 요즘에는 흔해진 사진만큼 그것이 주는 감동도 옅어졌다. 유행에 밀려 사진관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5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온 고마운 사진관이 있다. 사진관 이름에도 이 같은 소망을 담았다. 러키 세븐, '세븐 사진관'이다.
◆"백 살 된 카메라, 여기선 흔하지"
대구 수성구 수성1가에 있는 세븐 사진관의 주인은 금봉해(67) 사장이다. 사진관을 얼마나 했느냐고 묻자 "한 50년 됐나?" 하고 무덤덤하게 답한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군복 입은 남성의 증명사진은 빛이 바랬고, 유행이 한참 지난 빨간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한 젊은 여자의 사진이 그나마 최신 사진에 속한다. 먼저 눈이 간 것은 사진이 아니라 도처에 널린 카메라였다. 금 사장은 "저 방에도 카메라가 잔뜩 있는데 귀한 건 여기 말고 우리 집에 있어. 다 합치면 천 개 정도 될라나?"라며 눈이 휘둥그레진 기자를 보고 껄껄 웃는다.
농담이 아니다. 금 사장은 카메라 수집광이다. 열세 살 때 꼬박 5년간 돈을 모아 1만7천원을 주고 산 일본 카메라 '사모카'가 시작이었다. 사진을 처음 배운 곳은 금 씨의 이모집이 대구역 앞에서 운영했던 한국 사진관이었다. 귀한 카메라를 찾아 강원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관
사진관은 명절이 되면 늘 사람으로 붐볐다. 사진이 귀했던 시절, 좋은 날을 기록하러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명절에 항상 문을 열어뒀다. 원정 출사도 많이 갔다. 1980년대는 세븐 사진관의 전성기였다. '출사'라고 적힌 노란색 완장을 팔에 차고 다니며 고객을 찾아다녔고, 예식과 돌잔치, 공사장과 건축 현장, 심지어 사건'사고 현장에도 의뢰가 들어오면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옛날에는 사진사 대우가 참 좋았어. 예식 사진 찍으러 가면 사진사 먹으라고 한 상 차려놓기도 하고. 지금이랑 비교도 못 하지."
인물 사진은 실물보다 더 잘 나올수록 고객 만족도가 높아진다. 옛 사진사들도 '포토샵' 못지않은 필름 '연필 수정'으로 신랑 신부를 돋보이게 했다. "얼굴에 살이 없으면 연필로 살짝 볼에 색칠하고, 삐죽하게 깎기도 하고, 그때도 다 수정이 있었어. 요즘에는 컴퓨터로 하니까 신랑 신부가 다 딴 사람이 되잖아. 그래도 못 알아볼 정도로 수정하면 안 되지. 하하."
필름 카메라가 대중화됐을 때까지만 해도 사진 현상하러 오는 고객들 덕분에 사진관이 먹고살 만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관은 '부도 위기'를 맞았다. 세븐 사진관에 사진 촬영 의뢰가 안 들어온 지도 이제 7년이 됐다.
필름을 현상하러 오는 사진작가들과 금 사장에게 카메라 수리를 맡기려는 이들이 단골 고객이다. 가끔씩 자기 돌사진을 들고 와서 "우리 아들도 이렇게 옛날 느낌으로 돌사진을 찍어달라"며 옛 사진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찾는 가게는 절대 문을 닫지 않는다.
글'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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