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진 대구시장 당선인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 교대부속초교와 경안중을 졸업한 뒤 고교는 대구로 진학했다. '큰 뜻을 이루려면 큰 도시로 가서 공부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였다.
그는 "부모님을 떠나 하숙'자취 생활을 하면서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의 학업 경쟁, 도시의 낯선 풍경에 많이 방황했다"고 털어놨다. 청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안동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치 DNA가 선명해졌다. 결국 대학원에선 정치학을 전공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권에 눈을 돌린 건 통일원 통일정책보좌관을 지내면서였다.
권 당선인은 1999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요청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2000년에는 남경필'김영선 국회의원 등 초선 의원들, 이번 선거 경쟁자였던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혁신 성향 소장파 모임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미래연대)를 결성했다. 이번 선거에 함께 출마한 남경필 경기지사 당선인,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인 등도 미래연대 출신이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 보좌역으로 활동했다.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한 후 그는 2004년 '권영진의 정치'를 하겠다며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했다. 언제나 묵묵히 따라주던 아내가 처음으로 반대했다. 탄핵 역풍은 매서웠다. 17대 총선 서울 노원을에 출마해 2천 표(1.9%) 차이로 패했다. 석패였다.
2006년 기회가 찾아왔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을 이끈 주역으로 인정받아 43세에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발탁됐다. 오 시장의 끈질긴 설득 덕분이었다. 탁월한 정무적 감각을 인정받아 재임 중 언론과 서울시의회도 그를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2년 뒤 권 당선인은 노원을 재도전에 성공해 금배지를 달았다. 쇄신 의지도 잃지 않았다. 개혁 성향 초선 의원들을 모아 '민본21'을 만들었다. 여권 내 쇄신 불씨를 되살려 박근혜 전 대표와 화합을 강조한 것도 이때였다. 박 전 대표에게 당 구원투수로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제안하며 소장파와 가교 역할을 했다.
19대 총선에선 다시 고배를 마셨지만, 18대 대선에선 박근혜 선거대책위 기획조정단장을 맡아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 싱크탱크 격인 여의도 연구원 부원장으로 활동했다. 안동 촌놈 권영진의 도전은 대구시장으로 이어졌다.
"국회의원 당선 당시 기쁜 마음이 컸다면 지금은 상당히 무겁습니다. 대구를 혁신하고 살려달라는 시민의 뜻을 받든다는 것이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기에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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