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절정기 사회를 향하여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행복한 감동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꿈 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시민의식마저 한껏 높아져 거리 질서나 공중도덕이 선진국과 같은 수준으로 높아졌다. 미소가 스민 시민들의 밝은 표정은 내가 다른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시절 나는, 다시 오기 어려울 이러한 긍정적인 국민 에너지를 잘 모으면 우리나라가 그대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사회와 국가의 발전과 흥망성쇠에는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다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공동체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작은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긍정적인 변화가 꼬리를 물고 확대재생산되는 사회를 '절정기 사회'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세계사에서 BC 5세기경의 아테네, 예수가 활동하던 시절의 로마제국, 8세기의 중국 당(唐)나라, 15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뉴욕 등을 전형적인 절정기 사회의 예로 제시하였다. 이 시기에 공동체는 사회문화적으로 비약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되고, 국력이 융성하게 된다고 한다.

절정기 사회를 촉발시키는 과정은 비교적 작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긍정적 에너지가 절정기 사회를 이끌기엔 부족한 것이었다면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발생한 수백 명의 안타까운 희생으로 분출되는 슬픔, 분노, 그리고 지옥 같은 패배감을 우리 공동체의 혁신을 촉발하는 에너지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사건 이후 온 국민의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국가개혁을 향한 열망을 생각해 볼 때 이 엄청난 에너지는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충만한 에너지에 불씨를 당길 영웅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절정기 사회로의 도약을 촉발시킬 영웅은 진정한 웅변가일 것이다. 사욕을 탐하는 간교한 말재주와 기회주의적 임기응변은 잠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깊은 감동으로 국민을 이끌고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 위대한 웅변가는 세 치 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과 행동으로 실천한다. 하늘은 우리에게 이런 위대한 영웅을 허락할 것인가?

말의 무게를 아는 정치인은 말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온 국민이 투표로 뽑은 우리들의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커녕, 천박한 영웅심리로 대통령을 모욕하거나 국가를 모독하는 수준 이하의 정치꾼들을 볼 때 위대한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기는 아직은 이른 것 같다. 다만,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며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작은 영웅들이 많아지는 것을 볼 때 분명 우리는 절정기 사회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정재호(오블리제성형외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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