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 칼럼] 헐티재 가는 길

가을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꿈처럼 아련한 보랏빛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창댐을 가 보았는가. 우리네 영혼의 허기를 달래 줄 대구경북의 낭만 길로는, 팔공산 순환로와 더불어 가창댐에서 헐티재를 넘어 청도 팔조령으로 이어지는 한 바퀴 길을 꼽을 수 있다.

대구의 명물인 가창 삼거리 찐빵 집들을 돌아서면 어느새 느림의 미학은 시작된다. 상수원 보호를 위해 설치한 철조망에는 올망졸망 가을꽃들이 피어 있고, 산그림자 드리운 가창댐 끝으로 '오리'라는 예쁜 마을이 산허리에 매달려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정대리의 '달성조길방가옥'을 만나게 되는데, 첩첩산중의 산골 마을인지라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대구 속의 강원도'라 했겠는가. 돌고 도는 인생길에 잠시 쉬어 갈 만한 곳이다.

사람들은 굴곡 없는 인생을 꿈꾸지만 현실의 삶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이어지고, 반듯한 길을 걷다 보면 굽은 길을 만나게 된다. 세상사 빠름의 연속이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만 급급할 뿐, 잠시라도 쉬었다 가는 여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굽잇길을 오르내리고 돌다 보면 삶의 여유와 느림의 인내를 배울 수 있다. 헐티재로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워낙 험준하고 힘들어서 고개를 넘을 때면 '숨을 헐떡이고 배가 고파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청도 소장수 방울 소리는 굽이굽이 바람 되어 쩔렁이고/ 더디디 더딘 비슬산 기슭엔 노루마저 숨을 헐떡인다/ 수많은 사연들이 세월 묵은 고갯길에 추억으로 머무는데/ 계수나무 꽃향기 실은 달빛만 가슴 가득 쏟아질 뿐/ 어찌할꼬 억겁의 인연 타래 올올이 아득한 걸/ 속절없이 용천사 풍경 소리만 마중 나온 헐티재/

다시 고불고불 비슬산 길을 내려가다 보면, 커다란 모퉁이를 돌아 용천사가 있다. 고려시대에 일연선사가 주지(住持)로 재직하며 삼국유사의 원고를 탈고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샘물이 솟아오르는 절이라 하여 용천사(湧泉寺)인데, 석간수의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약수를 받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팔조령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씨 없는 감, 반시로 알려진 청도 감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청포도가 익어 가던 여름이 지나간 들녘에는 이제 허수아비가 막대기를 내려놓는데, 고추잠자리를 따라 분주한 농부들은 가을걷이에 한창이다. 이윽고 나타나는 고갯길! 호랑이로부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여덟 명 이상이 무리를 지어서 서로 도우며(八助) 고개를 넘었다'는, 상생(相生)의 팔조령이다.

하늘마저 자취를 감춘 벚꽃 가로수 터널이 짙푸른 녹음(綠陰)이 되었다가, 초록에 지친 나뭇잎들은 형형색색 단풍으로 불탄다. 이윽고 동화 속 설국(雪國)을 펼쳐서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이 한 바퀴 길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여정이다.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를 관조(觀照)하며 텅 빈 마음으로 한 걸음 내디디면, 행복이라는 놈도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거 스님/ 청도 용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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