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영화사에서는 문화영화 '고도경주'를 제작하기로 되어 방금 시나리오를 모집 중이라는데 제작 의도는 조선 문화의 전통을 파악함으로써 신조선 문화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며 제작은 전 3권 응모마감은 5월 15일 당선 발표는 5월 20일이라 한다."(대구시보 1946년 5월 6일 자 2면)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10월 1일. 대구 동성정(東城町) 일정목(一丁目)에는 이른 시간부터 청년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도 있지만 다수는 젊다. 해방의 감격을 이야기하다가도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해방이 되자 대구지역에는 민성일보, 대구시보, 영남일보 같은 신문이 나온다. 신문의 성격은 조금씩 달라도 공통 키워드는 자주독립, 부일 세력, 민족국가, 민족 반역자 청산, 식량난 등으로 한결같다. 하지만 일제 청산과 새로운 국가건설이 말처럼 쉬울 리 없다. 일문신문인 대구일일신문이 해방 후 달포 가까이 발행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라디오의 경우는 미군정이 직접 관리했다. 게다가 수신기의 값이 비싸고 지금의 TV수신료처럼 청취료까지 부담해야해 애초부터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문은 낮은 문자 해득 계층이, 방송은 경제적 부담이 발목을 잡았다. 이렇듯 제구실을 못하는 매체환경 탓에 주민들은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열악한 극장이나 영화전용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10월 첫날, 지금의 동성로에 모인 그들은 이런 상황을 비켜가지 않는다. 지식인 못지않게 일상 주민과의 소통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중요하다고 봤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없애고 민족문화와 향토문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무대와 영상으로 드러내기로 한 이유다. '10월영화공장'은 이렇듯 당찬 포부를 안고 세상에 태어난다.
10월영화공장은 창립하자마자 '10월영화공장 이동극단'을 조직해 마을과 농민조합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펼친다. 당시 인기공연이었던 '신불출 만담회'를 경주와 포항, 김천 등에서 공동으로 연다. 그해 12월에는 남녀 신인 연기자 양성을 위해 부설 연기자 양성소를 개설하고 여자 연기자를 모집한다.
10월영화공장은 10월영화사를 거쳐 조선문화영화사로 이름을 바꾸며 변신을 거듭한다. 경제기록영화인 '싸우는 열차'를 만들고 지역의 역사와 향토를 재발견하는 문화영화 '고도 경주'를 제작하기 위해 시나리오도 모집한다. 또 경상북도 공보과의 위촉을 받아 콜레라와 관련한 영화를 만들고 영주'봉화의 수해복구 공사와 서울서 열린 전국럭비대회를 촬영한다.
이는 '10월영화뉴스'라는 이름으로 시사문제를 다큐멘터리 뉴스영화로 제작해 담론화를 시도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1946년 11월 대구 키네마에서 '10월영화뉴스'를 상영한 것은 10월 항쟁기에도 뉴스영화 작업이 쉼 없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런 10월영화공장의 주도세력이 청년들이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대구 무대협회와 가두극장 등에서 민족과제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려 한 일단의 청년들과 그 인맥이 맞닿아 있다.
10월영화공장은 해방 이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무대에 올리는데 그치지 않고 민족사의 과제를 계승하는 일에도 힘을 쏟는다. 그럼에도 지역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는 점은 이른바 문화 분권에 앞장서고 실천한 셈이다. 이는 지방 도시로서는 대구의 10월영화공장이 첫손에 꼽힌다. 구슬은 꿰어야 값지다. 10월영화공장의 스토리텔링은 청년도시, 문화도시로서의 대구 품격을 확인하는 길이다.
일제가 남긴 눈에 보이는 유산도 문화고 역사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렇다면 10월영화공장은 어떨까. 작가 이병주는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달빛에 내버려 두기엔 아깝다. 10월영화공장은 역사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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