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생물이다. 골목은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지고, 생기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골목은 죽은 곳이다. 대구에도 변화하는 골목이 있다. 대봉동 전통시장이 있는 거리에는 예술가들이 들어와 새로운 골목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공구골목만 즐비했던 북성로는 그 속에 묻혀 있던 근대 역사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수백 년 역사의 약전골목에도 파스타집과 커피숍 등 현대적 건물들이 둥지를 틀며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있다. 이번 기사는 골목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주목했다. 그리고 골목에 새롭게 정착해 변화를 일구는 사람들을 만났다. 인터뷰는 이웃에게 이웃을 소개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새로운 이웃들이 만드는 골목과 마을 이야기다.
◆시장에서 마을로, 방천시장에서 김광석 거리로
지난주 오후 대구 중구 대봉동의 '아트팩토리 청춘'(이하 청춘). 지하 1층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인 이곳에 대봉동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우쿨렐레 강습소 겸 갤러리 카페인 '유칼립투스'를 운영하는 구근재(41) 대표와 조각가인 손영복(33) 작가가 차례로 도착했다. 기자가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은 청춘의 김유림(27) 공연사업부 실장. "좋은 이웃을 소개해달라"는 기자의 부탁을 받고 김 실장이 동네 이웃 두 사람을 부른 것이다. 이들은 모두 대봉동 방천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다. 이 중 대봉동 '선배'는 2009년 정착한 손 작가. 유칼립투스와 청춘은 2012년에 이사를 왔다.
방천시장은 이제 시장 이름보다 '김광석 거리'로 더 유명하다. 올해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언론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고, 평범했던 동네가 이제는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대봉동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다. 쇠퇴하는 전통시장을 문화 예술과 연계해 살려내자며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한 '문전성시 사업'에 방천시장이 선정됐고, 공공예술로 시장 환경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가진 지역의 예술가들이 몰려왔다. 북성로는 복원할 근대 역사가 있지만 방천시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대봉동에서 태어난 김광석을 '스토리'로 엮어 전통시장에 덧입혔다. 청소년들이 숨어 담배를 피우고, 쓰레기가 쌓여 있던 신천대로 벽에 예술가들은 김광석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려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왜 하필 대봉동이었을까. 가장 먼저 대봉동에 터를 잡은 손 작가가 이 질문에 답했다. 손 작가는 문정성시 사업의 초창기 멤버로 이곳에 왔고,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전성시 사업의 원래 목적은 '전통시장 활성화'였고, 이 목적만 놓고 본다면 성공했다고 평가하기 힘들다. 시장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시장에 예술이 더해지고, 김광석 이야기가 생기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월요일이었던 이날도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방문객으로 거리가 북적였다. 손 작가는 "'응답하라 1994' '히든 싱어' 등 온갖 방송에서 김광석이 언급되면서 지난해 겨울부터 사람들이 엄청나게 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광석 거리에는 기타 치는 김광석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 두 개가 있다. 이 동상들은 거리를 상징하는 간판과도 같다. 김 실장과 구 대표가 "그 동상 손 작가가 만들었다"고 말을 거들었고, 손 작가는 "두 번째 작품은 후배들과 협업이었다"고 웃으며 수정했다. 예술가들이 한 공간에 모이자 아이디어도 한데 모였다. 손 작가는 "혼자 작업을 했던 작가들이 대봉동에 와 체질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추진하니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주민과 소통하는 법
예술가들이 대봉동 문화 생태계를 만든다면 이것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은 청춘이 하고 있다. 청춘은 음악가들이 와서 노래만 하는 단순한 극장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운영하고 있는 '청춘소풍'만 봐도 그렇다. 참여형 문화체험 활동이라는 설명만 들어서는 청춘소풍을 이해하기 어렵다. 김 실장이 나서서 설명했다. "문화 예술을 즐기고 싶어도 바쁘게 살다 보면 이런 여유를 누리기 어렵잖아요. 사람들이 문화 활동을 체험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대봉동 문화마을을 알리자는 취지였어요." 청춘소풍은 말 그대로 소풍이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광석 거리와 방천시장 곳곳을 돌아다니고, 예술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청춘에서 마련한 콘서트를 보는 식이다. 지난 몇 달간 청춘소풍에 단체로 참여한 초'중학생들로 이 일대가 북적였다.
처음에는 시장 상인들과 갈등도 있었다. '마을을 살리고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소풍이었지만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하고 돌아가는 학생 무리가 매일같이 시장에 드나들자 볼멘소리가 나왔고, 학생들 앞에서 험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 실장은 "우리는 마을의 미래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시장 상인들과 의견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갈등을 푸는 법은 의외로 쉬웠다. 소풍 온 학생들이 매번 친절하게 인사를 하자 할머니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사람이 찾으니 항상 비어 있던 생선 가게 가판에도 신선한 생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 실장은 "소풍에 필요한 김밥은 시장 안 김밥집에서 단체 주문을 하고, 과일도 항상 시장 안에서 산다. 이제는 시장 분들이 덤으로 음식도 얹어주시고 동네 사람으로 받아주시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웃었다.
◆"마을이 잘돼야 한다"
청춘이 소풍으로 시장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했다면, 유칼립투스는 음악으로 대봉동 주민들과 소통한다. 방천시장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카페로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우쿨렐레 때문이다. 여섯 살 아이부터 60대 어르신까지 우쿨렐레 수강생들의 나이도 다양하다. 우쿨렐레 덕분에 대봉1동은 지난달 '대구 1등' 자리도 꿰찼다. 시작은 이러했다. 대봉1동 주민센터 동장이 유칼립투스를 찾아 "시에서 큰 대회를 하니까 한 번 준비해보자"고 건의했고, 구 대표는 20대부터 60대까지 동네 수강생 15명을 모아 한 달간 집중 훈련에 돌입했다. 김광석의 대표곡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을 우쿨렐레로 연주했고, 섹시한 튜브톱 의상을 입고 벼락치기로 연습한 훌라춤도 췄다. 그 결과 대구시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경연대회에서 8개 구'군의 쟁쟁한 참가자들을 꺾고 대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구 대표는 "구 대회에서도 1등을 해서 그때 받은 상금 60만 원으로 동네잔치를 했는데 적자가 났다"며 웃었다.
지금 김광석 거리의 최대 고민은 상업화다. 작은 상점만 즐비한 김광석 거리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들어올 예정이고, 대로변에는 대형 패스트푸드 업체가 입점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구 대표는 "김광석 거리에는 근대와 과거의 향수가 그리워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앞으로 거리가 현대적으로 변해 상업 공간만 남고 김광석 거리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질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마을은 공동체다. 공동체는 여럿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공동의 목표를 만들기 위해 겪어야 할 어려움도 분명히 있다. 이 같은 고민을 안고 전날 대봉동에서 축제가 열렸다. 바로 '방천아트페스티벌'이다. 대봉동 주민들과 시장 상인들, 새로 정착한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의미 있는 축제다. 대구의 떠오르는 관광 명소로 재탄생한 대봉동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11월 20일까지 진행되는 이 축제는 대봉동 곳곳의 카페, 소공연장, 거리에서 30여 팀의 음악가들이 공연하고, 대봉동 예술가들의 작품도 전시한다. "마을이 잘돼야죠. 그게 우리 목표예요." 대봉동 세 이웃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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