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여행과 기행(奇行)

친구 중에 '하리잔'이라는 녀석이 있다. 지금은 계명대학교 앞에서 PC방 사장으로 은둔해 있지만 이 친구 한때는 60여 개국의 오지를 여행한 굉장한 모험가였다.

그가 인도 북부 지방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한 번은 큰 마음 먹고 열차의 일등실을 예약한 그가 차량으로 들어서려 하자 일군의 인도인들이 그를 가로막고 섰다. 인도의 지엄한 양반들이 여행으로 지쳐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던 그를 네팔인으로 오인해서 벌어진 촌극이었는데. 친구는 "아 엠 코리안!"을 외치며 발명을 하지만, 그는 결국 집단 구타당하고 열차 밖으로 쫓겨난다. '하리잔'(不可觸賤民)의 탄생이었다.

하리잔은 도합 4년여를 여행하면서 각국의 여행 기인들을 만난다. '사회과부도'라는 한국인부터 소개해보자. 이 녀석은 부모의 강압적 지도에 반항해 원양어선을 탄 것이 가출의 시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친구, 여행자들의 필수품인 배낭이나 그 흔한 여행 가이드북 한 권 없이 달랑 중학교판 사회과부도 한 권과 여권만을 들고 탐험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엘비스'라는 일본인도 가관이다. 그는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녀석이었는데, 그 배낭 안에는 놀랍게도 수백 권의 만화책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하리잔이 그 연유를 물어보자 엘비스 가라사대, "만화책은 그 만화의 배경이 되는 현지에서 읽어야 제 맛이죠."

'종군해로'(從軍偕老)라는 커플은 파키스탄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 커플은 보스니아, 수단, 콩고 등 전쟁지역을 전문적으로 여행하는 기인 기녀였는데, 아프카니스탄에서 전쟁이 터지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밀수 루트를 통해 국경을 넘더라는 것이다. 하리잔이 "부시가 핵공격을 불사하겠다고 하던데요"라고 우려를 표하자, 기녀 왈 "총 맞는 것보다는 핵 맞는 게 나아요. 깔끔하니까."

중국에서는 '구루마맨'을 만난다. 그는 사회과부도와는 정반대로 구루마에 온갖 생필품들을 잔뜩 쌓아놓고 세계 일주를 나선 고행자였다. 하리잔이 행마 속도에 대해 의문을 품자, 그는 "5년이면 세계 일주 가능하다"며 달관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몇 년 뒤, 케냐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만난 하리잔이 구루마맨의 안부를 묻자 한 여행자 왈, "아, 그 친구 아직 중국도 못 벗어났데."

이란에서 만나 밀주를 나눠 마시던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전 세계 200개국의 남자들과 다 자보는 것이 목표에요. 40개국 정도 완료했어요." 흑심을 품은 우리의 하리잔, 그녀에게 접근하려 하자 그녀 왈, "한국 남자는 사양입니다." 하리잔이 '하리잔'(不可觸賤民)으로 확고하게 재탄생하는 날이었다.

박지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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