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찰떡과 홍시

추수를 끝낸 음력 시월은 묘사 시기다. 묘사 날이 정해지면 햇것들로 준비한 푸짐한 묘사 상차림으로 조상의 묘소를 일일이 찾아 감사의 제를 올린다. 그때는 문중 제관들이 다 모이기 때문에 온 산이 허옇다. 동네 아이들은 음복을 받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녔다. 얻어 모은 음식물은 귀한 간식거리로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응달진 곳에 매달아 두었다. 장작불로 갓 쪄낸 찰떡 위에 달달한 홍시를 터트려 젓가락으로 휙~ 감아 먹으면 그것이야말로 찰떡궁합이다. 약삭빠른 아이는 새치기로 두 봉개 세 봉개를 받아냈다. 동생이 없으면 베개 아기를 업고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직장 따라 타지에 계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오시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 묘사 날,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한 친구를 꾀어 집으로 가지 않고 외딴 묘소가 있는 먼 산을 찾아갔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장(張)씨들 묘사 끝내고 모두 돌아갔다고 했다. 다시 학교까지 돌아와서 집으로 가야 하는 거리가 한 삼십 리쯤 되었다. 한참을 오다가 오른쪽 산을 보니 저 산만 넘으면 우리 동네가 나올 것 같아 산에 올라갔다. 산등에 올라서니 더 높은 산이 우뚝 서 있었다. 저 산 하나만 더 넘으면 진짜 우리 동네가 있을 것 같아 길도 없는 곳을 헤쳐 올라가니 또 높은 산이 턱 막혀 있었다. 산속은 벌써 땅거미가 깔리고 춥고 무서웠다. 짐승 울음소리, 풀잎을 휘갈기는 산바람 소리….

늑대가 많았던 시절이라 동네에도 가끔 늑대가 나타나서 가축을 물어 가곤 했었다. 늑대는 사람의 키를 뛰어넘어 혼을 빼고 넘어지면 그때 잡아먹는 걸로 알고 있었다. 늑대가 나타나면 큰 나무를 꼭 끌어안고 절대 혼을 빼앗기지 말자고 단단히 약속하고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긁히고 찔려 피가 흘러도 아픈 줄도 모르고 겨우 길을 찾아 내려와 기진맥진 상태로 집에 가까워질 무렵,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식구들이 초롱불을 들고 찾아 나선 것이다.

할머니는 잘 쪄진 찰떡에 홍시를 얹어가지고 들어오셨고, 할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왔으니 되었다 하셨는데, 나의 몰골을 보고 엄마는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나를 때리려고 했다. 빨간 아까징끼를 상처에 발라주신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말랑한 찰떡에 홍시를 감아 주시면서 꼭꼭 씹어서 먹으라고 하셨다. 그런저런 시골의 진풍경들은 점점 사라져가지만 만날 수 없는 그분들의 사랑은 커다랗게 남아있다. 내가 대물림해줘야 하는 귀한 사랑이다. '아무리 큰 산도 눈동자보다 작고, 눈앞에서 재면 자기 뼘보다 더 높은 산이 없다'는 아버지 말씀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참 오랜만에 뼘으로는 잴 수 없는 그리움의 산을 올라가 본다.

장혜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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