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했습니다." 스물다섯 청년이 프로야구 정규시즌 최우수 선수 트로피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대신 침착하게 전한 수상소감의 한 구절이다. 넥센 히어로 서건창 선수가 그이다. 홀로 된 어머니에게 강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더욱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꿈의 구장에 우뚝 선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오랜만에 젊은 기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청년에게 박수를 보낸다.
1982년 정통성을 잃은 군사독재정권이 국민을 다독거리려고 선보인 프로야구가 갈수록 인기를 더해 지금은 젊은 여성들의 욕망의 해방구가 된 듯하다.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삶의 축약을 보여주는 인간 승리의 전설들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축제의 무대에 서기까지 흘린 땀의 결정이 전설의 진면목이다.
그는 안락한 카페에서 처세술이나 미리 공부하며 청년실업의 주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여느 청년들과는 달랐다. 연습생의 덫도 뛰어넘어야 하고, 벤치워머 끝에 찾아온 핀치히터의 설렘도 극복해야 한다. 우선은 학맥 인맥의 정글에서 두 집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미생마를 끌고 피 터지는 수읽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항상 흙 묻은 낡은 유니폼과 아물지 않은 부상의 흔적들을 그의 훈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 남들이 잠든 달밤에 피멍이 들도록 야구 배트를 휘둘러댔던 고독한 밤들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숙명의 이 길은 혼자 가야 한다.
삶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 수도 있다. 내가 나일 수 있으려면 나의 길을 가야 한다. 누구나 황홀한 비상을 꿈꾼다. 우리 사회의 생태계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을 살라고 강요한다. 개인의 노력을 정당한 대가로 평가해주는 관용의 폭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다. 해서 내가 나로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비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위에 자신을 다그쳐 세워야 한다. 이제까지 꿈은 이루어진다의 신념으로 달려온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일은 더욱 아니다. 미지의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야 한다.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이는 낭떠러지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이제까지의 걸음 그대로 한 걸음 더 내딛는 용기가 그것이다. 남다른 열정은 괴로움과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는 고난을 수반한다. 내가 선택한 길은 걸어가야 이루어진다.
30여 년 전 프로야구가 시작될 무렵 우연히 인사동 골목에서 구입한 액자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글씨였다.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의 진공 같은 시절도 하수상했고, 안개의 깊이만큼 앞길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강퍅한 출판사 초창기였다. 유명 서예가의 작품도 아니고, 익히 알던 글귀도 아닌 조그마한 액자에 끌려 지갑을 열었다. 제대하기 전 방책선 참호에서 세월을 낚으면서 나무판에 새겨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충무공의 '상유십이'(尙有十二)는 태고의 음향 속에 묻고, 이 글을 가슴에 품었다.
조그마한 사무실 벽에 걸어 놓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볼멘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때마다 이 글대로 벼랑 끝에서 또 한 걸음을 수없이 내디뎠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떨쳐 일어나 더 멀리 또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큰 바위 얼굴이 사람만이 아닌 모양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 내딛는 걸음걸음이 자신의 성장통을 이겨내고 어느새 큰 바위 얼굴로 체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큰스님의 화두였다고 하니 화식을 하는 나에게는 너무 큰 바위를 머리에 얹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전 직원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옆에 앙증맞게 걸어 놓았다. 없는 것을 찾는 젊은 그들은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름다운 청년들은 또 아름다워야 한다.
조상호(나남출판 회장·언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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