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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정미칠적·경술국적 다 포함된 이병무

정미칠적(丁未七賊)은 을사조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7명을 가리킨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에 따라 총리대신 이완용'농상공부대신 송병준'군부대신 이병무'탁지부대신 고영희'법부대신 조중응'학부대신 이재곤'내부대신 임선준이 찬성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는데 협조했다.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한일합방 조약 체결에 협조한 이완용'시종원경 윤덕영'궁내부대신 민병석'탁지부대신 고영희'내부대신 박제순'농상공부대신 조중응'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이완용의 처남인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을 가리킨다. 이 중 이완용 고영희 조중응과 더불어 이병무(1864~1926)도 양쪽에 다 포함된 인물이다.

18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등 무관 벼슬을 지냈고 이듬해 일본육사에서 수학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일본과 가깝게 지내면서 친일파로 활동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두고 일본이 고종황제 퇴위에 나서자 직접 칼을 뽑아들고 황제 앞에서 무력시위를 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1926년 오늘 사망하자 일제는 그에게 이틀 후 최고 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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