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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첫 육지전 승리 '영천성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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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의병 덕분에 보급로 차단…"국사 교과서 수록을" 주장 제기

영천시 창구동 금호강변 절벽 위의 명원루(현 조양각)는 1592년 7월 영천성 탈환전투 때 전소됐다. 당시 일본군 지휘부가 있었으며 1637년 그 자리에 누각을 지어 조양각이라 이름 붙였다. 1742년 중창 후 서세루란 현판도 달았다. 민병곤 기자
영천시 창구동 금호강변 절벽 위의 명원루(현 조양각)는 1592년 7월 영천성 탈환전투 때 전소됐다. 당시 일본군 지휘부가 있었으며 1637년 그 자리에 누각을 지어 조양각이라 이름 붙였다. 1742년 중창 후 서세루란 현판도 달았다. 민병곤 기자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전 승리인 '영천성 수복전투'를 제대로 조명해 국사 교과서에 수록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순천대 사학과 이욱 교수는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주최로 12일 영천시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리는 '임진란사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밝힌다. 이번 대회는 문화체육관광부'영천시 후원으로 '영천지역 임진란사 연구'를 주제로 열린다.

이 교수가 쓴 '임란 초기 영천지역 의병 항쟁과 영천성 복성' 논문에 따르면, 이항복의 저서 '백사별집'에는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영천복성전투가 임진왜란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고 기록돼 있고, 류성룡은 "영천성을 수복함으로써 왜군이 경주성으로 도망갔고, 일대 왜군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게 돼 경상좌도의 군읍이 안전해졌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영천성 수복전투를 간략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1592년 4월 18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사흘 만에 경주부에 무혈입성한 뒤 다시 이틀 만에 80여 리를 행군해 전투도 없이 영천읍성을 점령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에 주둔한 왜군 1천여 명은 사방에서 약탈'살육'파괴를 일삼았다. 5월 초부터 영천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했고, 7월 영천성 탈환 전투에는 4천여 명의 의병과 관군이 참여했다. 영천을 주축으로 인근 10여 개 읍이 동참했다. 최종 공세는 7월 27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승기를 잡은 의병들은 포로들을 성 밖으로 탈출시킨 뒤 미리 준비한 나무에 불을 질렀다. 계절풍을 이용한 화공은 적중했고, 왜군은 불에 타 죽거나 빠져나오다 미리 기다리던 의병에게 살해당했다. 왜군은 거의 전멸했고 경주로 탈출한 이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통해 경주'영천'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됐고, 의병은 승세를 이어 경주와 울산 읍성까지 수복했다.'

이 교수는 "임진왜란과 경상도 의병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위해 영천성 복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번 발표를 계기로 영천성 복성과 영천지역 의병장들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돼 교과서에 반영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영천 민병곤 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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