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이선희 양육비이행관리원장

"부모 한쪽이 아이 키우는 가정 47만…양육비 지급은 17% 뿐"

▷1949년 대구시 동구 지저동 출생 ▷서울 금호공민학교
▷1949년 대구시 동구 지저동 출생 ▷서울 금호공민학교'협성고등공민학교'진명여고 졸업 ▷이화여대 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회 사법시험 합격 ▷서울 가정법원'민사지법'고법 판사 ▷대전지법'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국가정보원 북한이탈주민 1호 인권보호관 ▷양육비이행관리원 원장

"꿈은 씨앗을 심어놓아야 합니다. 말도 씨앗이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속에 씨앗을 심어놓고 계속 바라보고 노력하면 될 수 있습니다."

이선희(65) 양육비이행관리원 원장은 악바리다. 형편이 어려워 또래들이 4학년 다닐 때 초등학교에 입학, 학비를 내지 않는 학교를 전전하면서도 마음속에 심어놓은 씨앗을 키워 결국 판사가 됐다. 작고한 이해봉 전 국회의원의 부인이기도 한 이 원장은 업무시간 이후인데도 남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징계를 받은 뒤 헌법소원을 냈고, 친일파 이완용 후손의 재산환수 소송에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1심에서 각하 판결을 내렸다. 그의 실천적 행동은 선거법 일부를 바꾸고, 친일재산 환수법을 만드는 데 단초를 제공했다. 악바리 이 원장의 살아온 얘기와 현재를 들어봤다.

-성장기와 학창생활은 어떠했나.

▶2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곱 살 때 집이 대구 동촌비행장으로 편입되면서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학교 대신 교회에서 뛰놀아야만 했다. 형편이 어렵고, 여자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교회가 운영하는 돈 들지 않는 학교에 뒤늦게 편입했다. 옛날에는 포장지 대신 신문이나 잡지로 물건을 포장했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신문이나 잡지를 열심히 읽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교회에서 어른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판사인 황윤석 판사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막연하게 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판사 재임 중 기억에 남거나 보람 있는 판결은.

▶2000년 서울중앙법원 부장판사로 있을 당시 친일파 이완용의 후손이 낸 재산환수 소송을 판결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송은 일제강점기 때 적극적으로 친일을 해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은 이가 경기도에 땅을 많이 받았는데, 이 땅이 국가로 등기가 돼 있다며 돌려달라고 그 손자가 부인 이름으로 소송을 낸 사건이었다. 1심 판결에서 각하시켰다.

-판결 이유는.

▶헌법 전문에 '3'1정신을 계승하고'란 표현이 있다. 3'1정신을 계승하는 헌법을 지켜야 할 법원에서 3'1정신을 적극 부정하고, 친일을 도모했던 사람의 재산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 1심 판결 뒤 2시간여 만에 인터넷에 수천 건의 댓글이 달렸다. 이 판결이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을 만드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자부한다.

-아쉬운 판결이나 사건은.

▶1980년대 서울가정법원 판사 재직 당시 중학교를 중퇴한 홍모라는 소년의 절도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다. 그 소년은 심리 과정에서 차도 사고 싶고, 집도 사고 싶다고 했다. 사정이 딱하고 안타까웠다. 내가 '그렇게 해서는 가질 수 없다'며 용접자격증이라도 따면 취업을 할 수 있으니 자격증을 딴 뒤 찾아오면 취업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년여 뒤 서울 민사지법으로 옮겨 현장검증을 다녀온 사이 그 소년이 다녀갔다고 직원이 전해줬다.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아 결국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지금도 어디서 잘 살고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인권보호관을 지냈는데.

▶6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의미 있는 일을 했다. 국가정보원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수사와 조사과정에서 인권침해 요소를 없애기 위해 지난해 처음으로 인권보호관 제도를 신설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수사나 조사과정에서 불합리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건의함을 통해 하소연했고, 내가 1주일에 한 차례씩 찾아가 건의함 내용을 보고 상담을 통해 개선책을 모색했다.

-돌아가신 이해봉 전 국회의원은 어떻게 만났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79년 말 서울지검에서 실무수습과정으로 검사시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전 의원과 대학 동기로 당시 검사였던 선배의 주선으로 만나게 됐다. 이 전 의원은 당시 행정고시를 거쳐 내무부 서기관으로 있었고, 인품이 훌륭해 결혼하게 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걱정(?)대로 정치 바람을 타 민선 대구시장 출마와 함께 매번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다.

-판사로서 남편의 선거운동을 돕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남편은 체육청소년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나온 뒤 민선 대구시장에 출마했다. 차관 시절 삼성자동차 대구 유치에 대해 이건희 삼성 회장으로부터 확답을 받은 상태였는데, YS(김영삼 전 대통령) 때문에 부산으로 갔다. 삼성자동차 대구유치 공약을 두고 YS를 계속 비판했다. 이 때문인지 내가 법적으로 정해진 24일 휴가를 써 남편의 선거운동을 도우려 했는데, 법원에서 허용해 주지 않았다.

1995년 6월 선거를 앞두고 휴가 대신 업무를 끝낸 뒤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대구로 가 명함을 돌렸는데, 법원에서 '품위 손상'이라며 감봉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당시 공직선거법에는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하지 못한다'는 조항과 '배우자는 후보자와 같이 본다'는 조항이 병존했는데, 법원은 앞 조항을 잣대로 나를 징계했다.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지만, 이듬해 서면경고 시점을 계산해 헌법소원 신청 기일을 넘겼다고 각하 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사이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하지 못한다(다만 배우자는 예외로 한다)'는 조항으로 법이 고쳐졌다. 내 헌법소원이 법을 바꾸는 단초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의 소망은.

▶양육비이행관리원이 3년 안에 잘 안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양육비는 차세대를 키우고, 아이들의 생존권과 관련 된 문제라는 점에서 사회'국가적으로 높은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선진국은 양육비 미지급 시 운전면허 취소, 출입국 금지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전국에 지부를 두고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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