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늘을 사랑했네
버스를 놓치고
가버린 저녁을 기다리고
눌린 돼지머리 같은 달을 씹으며
어둠을 토해내던,
그 그늘을 사랑했네
오지도 않을 그림자를 밟고
두려움 많은 눈으로 밤을 더듬으며
숨어 연애하던,
그 그늘을 사랑했네
저 혼자 배불러오는 봄을 향해
입덧을 하고, 쏟아지는 소낙비에 젖어
내 안에 그늘이 없다는 걸 알아버린
그늘을 사랑했네
언젠가는 같이 늙어갈 거라고
슬그머니 내 허벅지를 베고 눕던, 그 그늘을
사랑했네
(전문 『희다』. 문학동네. 2013)
페미니스트 철학자로 부를 수 있는 이리가레는 남성 체계적 언어 속에서 "여성은 결코 동일한 방법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성이 말할 때는 그 방법이 마치 흐르듯 진행되며 수시로 변하고 무엇보다도 명확하지 않고 희미하다"고 말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남성 시인인 나는 아직도 여성의 그 어떤 말은 이해되지 않는다. '라일락 꽃잎이 술렁이는 그 그늘'은 무엇일까?
시는 연대기적으로 진행된다. 젊은 시절-연애하던 시절의 그 그늘-이제는 그 그늘이 아니라 그늘 자체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그늘-그 여자의 그늘을 베고 눕는 남자의 그늘. 라일락 꽃잎 아래 '희미하게' 의미 드리워진 그 그늘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 희망은 어떤 희망일까? 문득 그 그늘로 하여 미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 의해 발명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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