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에게든 신하에게든 권위가 없는 허수아비 왕이었다. 이유는 왕 노릇을 하는 동안 딱 한 번의 명령밖에 내릴 수 없는 운명을 하늘의 별들이 줬기 때문이다. 나라의 재정(財政)과 인사(人事), 군(軍) 등 모든 지휘권이 없고, 심지어 왕자와 공주의 혼인문제까지도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자 왕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별들에게 복수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단 한 번 내릴 수 있는 명령을 바로 별들에게 내리는 것이었다.
"나에게 이런 운명을 준 별들은 모두 땅에 떨어져 꽃이 되어라. 내가 너희들을 밟아 주겠다"고 외쳤다.
왕의 명령으로 별들은 하염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그 별들은 민들레가 되었다. 그러고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왕은 목동이 되어 별빛같이 노란 민들레꽃을 짓밟고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분노는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 동물학자 로렌츠는 동물에게 내재된 공격성이 좌절로 바뀌면 화(怒)가 생긴다고 했다.
그런데 동물 가운데 사람처럼 잔인하게 화를 내며 공격성을 표출하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늑대끼리도 싸우다가 상대편이 목이나 복부를 내보이며 무저항의 자세를 취하면 공격을 멈춘다는데, 늑대만도 못한 것이 인간일까?
최근 뉴스 가운데 가장 엽기적인 사건은 일가족이 모의해 가장을 살해하려다 중태에 빠뜨린 일일 것이다. 억대의 재산을 노리고 아들과 딸, 부인까지 가장 살해 범행을 공모했다고 한다. 패륜아를 넘어 패륜가족이라는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에 대한, 또 남편에 대한 불만과 물질 욕심이 극도에 이르러, 결국 가족 전체가 집단 분노화 되고, 반인륜적 범죄를 거침없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 극악무도한 범행 이전에 푸닥거리라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잡귀들의 장난에 의해 생활상의 파탄이 온다고 느껴졌을 때 우리 선조들은 푸닥거리를 하여 그 귀신들을 물리쳤다. 한편으로 타포(打匏)라는 바가지 깨는 굿을 베풀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깊은 밤중에 헌 바가지 한 줄(10개)을 가지런히 엎어놓은 채, 화병 난 사람으로 하여금 몽둥이로 후려쳐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 바가지를 잘게 깨어 짓뭉개게 했다. 푸닥거리든 타포 굿이든 분노를 그때그때 해소해버렸던 조상들의 민간신앙이 차라리 그리운 대목이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비해 평균수명이 현저하게 늘어났지만, 분노 조절 능력은 오히려 선조의 능력에 못 미친다. 막걸리 한 잔과 궐련(卷煙'담배) 한 대만으로도 시름을 뛰어넘었던 옛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우리들은 좀 더 낙천적일 필요가 있다. 한고비 숨 쉬어 지나면 되는 것이고, 얼음장 밑에서도 물고기는 노닌다. 매화 꽃망울은 눈보라 속에서 피어올라 설중매(雪中梅)라 했거늘, 인내는 키우고 분노는 절제해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모든 죄의 근본이 되는 칠죄종(七罪宗)의 하나로 분노를 지목했다. 분노는 투쟁 복수 등을 유발하여 정의와 사랑을 침해하기 때문에 대죄(大罪)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분노를 자제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분노의 지뢰밭을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이 깊이 새겨야 할 부분이다. 참된 말이 거짓말을 이기고 은혜는 인색함을 이기듯이, 선은 악을 물리치며 인내는 분노를 가라앉힌다.
지거 스님/청도 용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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