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세계 최초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순수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해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감성을 일깨우며,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자 평생 노력하신 소파 방정환 선생. 어린이를 새와 꽃에 비유하며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자연에서 뛰노는 '어린이 세상'을 만들겠다던 방정환 선생이 하늘에서 가슴 아파할 소식이 어린이날 아침 TV 뉴스를 도배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열 살 어린이가 낸 '솔로강아지' 라는 동시집의 일부 시가 논란이 된 것이다. '학원가기 싫은 날' 이라는 제목의 이 동시에는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라며 '엄마를 씹어 먹어, 눈깔을 파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초등학생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동시 옆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과 피가 묻은 심장을 먹고 있는 여자 아이의 삽화까지 그려져 잔혹하고 섬뜩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나 역시도 어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있다. 이유도 모른 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억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싫어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반항심은 '찻잔 속 태풍'처럼 딱 그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차원이 다르다. 치기 어린 10대의 삐딱함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위험천만하다. 원인이 뭘까? 공교육과 사교육의 숨 막히는 쳇바퀴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의 현 주소인가? 아니면 막장 드라마, 또 그 드라마 못지않은 패륜 뉴스를 잊을 만하면 접해야 하는 우리들의 숙명인가? 온라인 게임 등 잔인해지는 미디어 환경의 부작용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까?
원인을 단적으로 말할 수 없기에 처방을 얘기하는 것도 섣부를 것이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건 이번 사건을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한 아이를 둘러싼 사회의 환경이 그 아이의 인격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국제기구 유니세프의 조사 결과, 한국 어린이들이 공부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조사됐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어린이는 2명 중 1명으로 유럽 국가들의 2, 3배가 넘었다. 어른들은 매달 허리띠를 졸라매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데, 정작 아이들은 마음의 병을 키워가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교육을 뒤로하고 아이들을 마음껏 뛰놀게 하라는 비현실적 얘기를 하고 싶진 않다. 1세기 전 방정환 선생이 꿈꾼 어린이를 위한 '아름다운 감성과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과 2015년 우리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힘든 현실을 우리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게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교육을 해나가야 한다. 네가 무엇을 위해 지금 달려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때론 쳇바퀴를 돌고 책과 씨름도 해야 하는지, 아이들과 치열하게 대화하고 설득해 내 아이의 생애 GPS를 제시해 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고 책무다. 하지만 대전교육연구소가 최근 관내 초'중'고 20개 학교 학생 1천219명을 조사했더니 무려 48%가 '평일에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하루 1시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답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정의 달인 5월, 우리 어린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어린이날'을 원한다면, 부모들은 '어른 반성의 날'로 정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아이들에게 '대화'라는 교육적 선물을 얼마나 자주, 많이 주었는가를 진단하고 처절하게 반성해보자는 말이다.
이정미/MBN 앵커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