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고교야구 역사를 이야기하다…서석진 TBC 야구해설위원

"이승엽·배영수같은 제자들 한국 야구 대들보로 키웠으니 된 거죠"

1970년대 경북고 야구 전설의 주역이었다가 후에 모교에서 10년간 감독을 맡았던 서석진(TBC 야구해설위원) 씨를 만나 당시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에 앞서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촬영시간을 가졌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1970년대 경북고 야구 전설의 주역이었다가 후에 모교에서 10년간 감독을 맡았던 서석진(TBC 야구해설위원) 씨를 만나 당시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에 앞서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촬영시간을 가졌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서석진 해설위원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 야구인생, 경상중을 거쳐 1974년 경북고에 입학한다. 1976년 4강 개인타격상을 수상하며 당시 경북고 야구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양대에 진학해 김시진, 김용남과 함께 1979년 대통령기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86년부터 10년간 모교에서 감독을 맡아 1993년 청룡기 우승 등을 지휘했다. 1993년 청소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일본 원정경기에서 6전 전승을 거둬 일본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2000년 제주 탐라대(현 제주국제대학) 감독을 거쳐 현재 TBC 야구해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석진 해설위원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 야구인생, 경상중을 거쳐 1974년 경북고에 입학한다. 1976년 4강 개인타격상을 수상하며 당시 경북고 야구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양대에 진학해 김시진, 김용남과 함께 1979년 대통령기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86년부터 10년간 모교에서 감독을 맡아 1993년 청룡기 우승 등을 지휘했다. 1993년 청소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일본 원정경기에서 6전 전승을 거둬 일본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2000년 제주 탐라대(현 제주국제대학) 감독을 거쳐 현재 TBC 야구해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랑바리 다라나바로웅~손오공' '우주소년 아톰' '어깨동무' '김일 선수 박치기'….

현재 40~60대 세대들에겐 공유하는 문화코드들이 있다. 이런 시대적 문화 현상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또 하나의 추억, 바로 고교야구에 대한 기억이다.

'캉~'하고 울려 퍼지던 배트의 타격음은 전국을 들썩였지만 특히 대구는 그 열광의 진원지였고 숱한 화제의 중심지였다. 그 중심에 경북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라는 양대 산맥이 있었고 가끔 대구고가 깜짝쇼를 벌이며 전국의 화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전국대회 우승 30회(2009년 기준), 1971년 전국대회 7관왕의 경북고는 야구사의 전설이었고 당시 펼쳐진 게임 하나하나가 역사였다. 당시 경북고 선수라인의 중심이었다가 1986년 이후 10년 동안 모교에서 야구감독을 맡았고 지금은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석진(55) TBC 야구해설위원을 만났다.

◆1967~81년 최고의 전성기 누린 경북고

고교야구의 황금기는 경북고의 전성기와 일치한다고 할 정도로 경북고는 한국 고교야구사의 중심이었다. 1967년 대통령배와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국 무대에 존재를 알린 경북고는 그 이듬해에 최초로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그러나 이 화려한 승전보들이 3년 후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위한 서곡이었음을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윽고 대망의 1971년이 밝아 오면서 경북고는 대회 우승컵(기)을 하나씩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때 거둬들인 성적은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기, 화랑기 이외에 지방대회 우승을 합쳐 종합 7관왕이었다. 당시 남우식, 정현발, 천보성, 배대웅, 황규봉으로 이어지는 투타라인은 고교야구 사상 최고의 전력으로 꼽힌다.

당시 콧물을 흘리며 야구를 시작했던 서석진 해설위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경북고 7승이 전설이었다면 그 신화의 배경에는 남우식이라는 걸출한 투수가 있었어요. 당시는 토너먼트 방식이어서 거의 매일 경기가 열렸는데 남 선수 혼자 5, 6승을 올렸어요. 전 대회를 혼자 뛰다시피 했으니 무쇠 어깨라 불릴 만했죠."

1981년 경북고는 또다시 고교야구 최강자로 부상을 준비한다. 당시 박노준, 김건우라는 스타플레이어를 앞세우고 최강 전력으로 평가받던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격파하며 세 번째로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좌완 에이스 성준과 잠수함 문병권이 타선을 봉쇄하고 초고교급 류중일이 신기에 가까운 수비를 펼쳤다. 당시 안타성 타구를 얄밉게 잡아내던 류중일은 서울시민(선린을 응원하는)들의 공적이었다. "안타입니다. 어! 잡혔나요?" 류 선수 때문에 당시 캐스터들은 숱한 오보(?)를 남겨야 했다.

이만수, 김시진, 양일환, 장호연, 오대석, 홍승규를 배출한 대구상고도 기동력을 앞세워 뚝심 있는 경기를 펼쳤다. 1960~1981년 동안 우승 9회, 준우승 10회를 기록하며 대구야구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73년 '안타제조기' 장효조가 이끌던 봉황대기가 인상에 남아요. 장 선수는 당시 6할에 가까운 타력으로 상대의 마운드를 초토화시켰죠."

◆이승엽'배영수'권혁 길러낸 조련사

경북고 졸업 후 한양대로 진학했던 서 위원은 선수 생활을 마치고 1986년 모교 감독으로 부임했다. 지도자 생활 중 전국체전, 청룡기 우승 같은 업적도 일궈냈지만 당시 제자들을 발굴해 동량으로 길러낸 일을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기고 있다.

첫 번째 인연은 바로 이승엽 선수와의 만남이다. "승엽이는 제가 중앙초교 때부터 눈여겨보던 선수였어요. 당시에 투타 모두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사이드암이라는 장점도 있었죠. 경상중 때부터 스카우트하기로 맘을 굳히고 복날마다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했어요. 이렇게 공을 들인 덕인지 승엽이는 3년 내내 4할대를 쳐내며 청룡기(1993년)를 우승으로 이끌었어요."

이승엽을 놓고 경쟁학교들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면 배영수의 경우에는 일이 아주 쉽게 풀린 케이스였다. 당시 배영수는 다른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였는데 평소 경북고를 마음에 두고 있던 부친이 막판에 당시 서 감독을 찾아와 입학서류를 바꿔버린 것이다.

정식 사제 관계는 아니지만 권혁 선수와의 인연도 무척 재미있다. 수창초교 에이스였던 권혁은 성광중 1학년 때 키가 너무 작아 야구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몇 년 새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180㎝대로 성장해버린 것이다. 자라난 키만큼 야구에 대한 열정도 다시 커지자 권혁은 당시 야인으로 있던 서 위원을 찾아왔다.

"14개월 동안 맨투맨으로 지도를 했어요. 열심히 투구 폼을 잡아줬죠. 자세가 잡히면서 볼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군요."서 위원은 지인이 있던 포철공고로 진학을 주선했다. 이렇게 야구 꽃을 피운 권혁은 시속 150㎞대 강속구를 뿌리며 화려하게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배트 대신 마이크를 잡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필드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그라운드'를 떠날 기회가 찾아왔다. 2013년 TBC에서 야구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로의 진입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쌓은 경륜을 펼쳐보일 좋은 기회라 여겨 사인을 했다.

'반년은 지나야 운동장이 보인다'고 하는 중계의 어려움처럼 서 위원도 처음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그저 경기를 따라가기에 바빴죠. LA 다저스 빈 스컬리 같은 명중계를 그리며 마이크를 잡았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이게 쉽지 않았습니다. 서너 달쯤 지나니까 운동장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절반에 가까운 경기를 어웨이로 치르다 보니 시즌 기간 절반은 출장이다.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할 때는 늘 죄스럽다. 그래도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는다.

"40여 년 동안 필드에만 있었어요. 그곳에 제 청춘이 녹아있고 제 삶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배트를 내려놓고 중계석으로 올라왔어요. 스튜디오와 그라운드 사이 어디쯤 제 야구 인생이 있겠죠.이젠 '마이크 인생'에서도 3할대 안타를 쳐야죠."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하이틴 잡지 모델, 연예인 제치고 고교야구 선수들 몫이었죠

선린상고 박노준 선수가 결승전에서 발목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학교 담장 안으로 수백 개의 종이비행기들이 날아들었다. 그의 쾌유를 비는 여학생들의 편지들이었다. 입원 당일 병원 밖에선 수백 명의 소녀 팬들이 울음바다를 이루었고 이 장면은 그날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당시 고교야구 선수들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서 위원은 '요즘 아이돌 스타들을 능가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연예, 잡지의 인기투표엔 고교야구 선수들이 언제나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하이틴 잡지의 표지모델도 야구선수들이었다.

지역 고교들이 전국대회 우승을 하면 도심 퍼레이드를 벌였고 그 연도 맨 앞줄엔 언제나 소녀 팬들이 있었다. 지역에서는 성준, 문병권, 장효조, 류중일 선수 등이 하이틴 잡지 모델에 단골로 등장했다. 한창땐 팬레터도 수백 통씩 받았다고 한다. 류중일 감독도 얼마 전 인터뷰에서 '아직도 펜레터가 몇 박스가 된다'며 '요즘도 가끔 편지들을 읽으며 그때를 회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팬레터의 주인공들은 지금 50대 주부들이 되었을 것이고 자녀들이 어느덧 자신들의 또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월에 무뎌지고 가사(家事)에 묻혀 있지만 왕년의 소녀팬들 가슴 한구석 그때의 감성, 야구 열정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상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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