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6>소박한 삶의 공간, 미로골목 (상)

꼬불꼬불 출구 헤매던 '迷路' 담벼락에 벽화 입히자 '美路'

대구의 한 미로골목 담벼락은 소박한 정원이다. 대구 중구.
대구의 한 미로골목 담벼락은 소박한 정원이다. 대구 중구.
왼쪽, 오른쪽, 직진 아니면 뒤로 되돌아가기. 미로골목 탐험은 선택의 연속이다. 대구 중구.
왼쪽, 오른쪽, 직진 아니면 뒤로 되돌아가기. 미로골목 탐험은 선택의 연속이다. 대구 중구.
일제강점기 근대건축의 흔적인 붉은 벽돌을 쉽게 볼 수 있는 중구 북성로와 동산동 일대 미로골목.
일제강점기 근대건축의 흔적인 붉은 벽돌을 쉽게 볼 수 있는 중구 북성로와 동산동 일대 미로골목.
대구 달서구 두류동 파도고개 인근 미로마을.
대구 달서구 두류동 파도고개 인근 미로마을.

'미로'(迷路). 영어로는 'maze'(메이즈) 또는 'labyrinth'(래버린스). 순우리말로는 '홀림길'이다. '어지럽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섞갈리기 쉬운 길'이라는 뜻이다. 골목길에서는 아마 이런 의미로 통하지 않을까. 초행자들은 홀린 듯 헤매며 아찔함을 느끼다 결국은 황홀감을 맛보고, 이내 출구를 찾고는 탈출의 쾌감을 얻는, '미로 찾기 게임' 같은 길이다. 반면 길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미로에 홀릴 일 없이 큰길의 번잡함을 피해 질러갈 때 쓰는 '지름길'이다. 또 주민들은 인적이 드문 이점을 살려 짐을 놓아두는 공터로, 소박한 정원과 텃밭으로, 이웃과 정을 나누며 어울리는 쉼터로 다양하게 활용하는 '삶의 공간'이다. 이러한 '미로골목'이 대구에도 적지 않게 있다. 다만 도시 개발의 영향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고갯길 속 벽화 가득 미로골목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내당역에서 성당시장 네거리까지 이어지는 1.3㎞ 정도 길이의 고갯길. 고개의 굴곡이 파도처럼 '넘실넘실'거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파도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실제로 차를 타고 이곳에 있는 크고 작은 네댓 개 고개를 넘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파도고개는 '파도고개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 차도만 가리키지 않는다. 큰 파도에 작은 물결이 무수히 이어지듯이, 고갯길은 주변 갈래로 또 갈래로 퍼지며 수도 없이 많은 골목길을 만든다. 고갯길의 불규칙한 굴곡을 따라 집들이 들어서다 보니, 주택가는 자연스럽게 복잡한 미로를 형성했다. 바로 미로골목이다.

2013년 이곳 달서구 두류1'2동 일대에는 미로마을이 조성됐다. 새로 마을을 지은 것이 아니라, 미로골목 속 1970, 80년대 주택 담벼락 곳곳에 벽화를 입힌 것이다. 대구 달서구청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골목 구석구석에 벽화를 그렸다. 미로(迷路)골목은 미로(美路'아름다운 길)골목이 됐다. 벽화 작업이 완료된 이후 마을 환경이 개선된 것은 물론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계단 따라 오르내리는 미로골목

고개가 미로골목을 낳은 지역은 대구에 또 있다. 파도고개 못지않은 고갯길을 자랑하는 서구 원고개 일대다. 원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원님이 지나다닌 곳이라서, 원님이 대구에 부임하러 올 때 또는 다른 곳으로 갈 때 쉬었다 간 곳이라서, 새로 부임 온 한 원님이 이 고개를 넘다 죽어서 등이다. 아무튼 이곳에 있는 원고개 시장은 대구 서구의 대표적인 맛집 골목으로 유명한데, 미로골목은 시장 뒤편 주택가에 가면 정체를 드러낸다.

원고개 미로골목을 걷다 보면 계단을 심심찮게 밟을 수 있다. 길과 길 사이가 툭하면 계단으로 연결된다. 집 앞 대문과 골목길을 이어주는 네댓 단의 작은 계단도 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모두 편리하고 안전한 보행을 위해 고갯길의 경사를 완화시켜주는 장치들이다. 또 계단 설치 때문에 만들어진 빈 공간은 방치되지 않고 꽃이나 채소를 가꾸는 데 활용된다. 모두 이곳 주민들의 오랜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원고개 시장 뒤편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비봉초등학교를 지나 경부선 철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비봉초등학교에서 경부선 철길까지 내려가는 고개의 경사가 꽤 크다. 그래서 이곳에는 대구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길고 가파른 계단이 설치돼 있다. 걸어 오르며 계단의 단 수를 모두 세어봤더니 105개나 됐다. 절에 가면 수행의 의미를 담아 걷는 단 수 108개의 계단이 있다. 이곳 계단을 바라보니 통학을 위해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수없이 오르내렸을 어린 학생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공부 성적이야 누가 누구보다 더 높거나 낮다지만, 이 계단을 부지런히 밟은 고된 수행의 걸음 수는 다들 비슷할 것이다. 닮은꼴 계단이 주변에 2개 더 있다.

◆대구 역사를 말해주는 미로골목

대구 중구 북성로, 동산동, 남산동 일대 미로골목에 가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근대의 흔적이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에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쓴 붉은 벽돌이다. 보통 '적벽조 건물'로 분류되는 건물의 외벽을 가리킨다. 당시 붉은 벽돌은 서양식 건물을 지을 때에도 썼지만, 이 벽돌로 집을 지은 다음 맨 위에는 기와지붕을 올리기도 했으며, 주택의 담장만 쌓기 위해서도 활용했다.

거주자들은 붉은 벽돌로 된 외벽에다 다른 벽돌을 쌓거나 시멘트로 보수하며 계속 살았고, 지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기존 붉은 벽돌 위에 새 붉은 벽돌을 쌓아 색깔을 맞췄지만, 자세히 보면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 세월의 층이 구분되는 건물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프고 분한 역사를 품고 있는 미로골목도 있다. 중구 남산동과 대신동에 남아 있는 미로골목의 흔적은 대구읍성 해체 사건과 관련이 있다. 1906년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도시 발전의 장애물이라며 대구읍성 철거를 주장했다. 그러자 친일 관료였던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 박중양은 인부 60명을 비밀리에 데려와 한밤중에 읍성 성벽 여러 곳을 허물었다. 조선 조정은 허락도 없이 성벽을 철거한 죄를 물어 박중양을 해임하려 했지만, 당시 조선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개입해 무마되고 말았다.

그리고 1년 뒤인 1907년 대구읍성은 완전히 해체됐다. 이후 성벽이 없어진 자리를 따라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 등 사성로가 놓였다. 일본인들은 이때 만들어진 반듯한 가로망을 따라 거주지를 조성했다. 반면 읍성 안에 살다 쫓겨난 조선인 중 일부는 가까운 남산동과 대신동 일대에 아무렇게 터를 잡고 살 수밖에 없었다. 모두 미로골목이 말해주는 지난 100년 대구 역사의 페이지다.

글'사진 황희진 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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