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여자들의 핸드백을 흔히 잡동사니나 넣고 다니는 가방 정도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여자들에게 핸드백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에게는 가방의 기능이 우선일 수 있지만, 여자들에게는 디자인이나 색감, 질감이 우선된다. 그래서 남자들은 쇼핑에 나섰다가 꼭 마음에 드는 가방을 찾지 못하면, 그것과 비슷한 가방을 구입하는 것으로 쇼핑을 끝낸다. 가방의 기능은 엇비슷하니까. 그러나 여자들은 마음에 꼭 드는 가방을 찾지 못하면 다른 백화점을 뒤지고, 거기서도 찾지 못하면 다음을 기약한다. 가방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여성 패션은 남성 패션보다 더 빠르고 다양하게 발달한다.
며칠 전 시베리아 역사박물관이 고대 인류의 팔찌를 공개했다. 시베리아 남부 데니소바 동굴에서 2008년 발견된 이 팔찌는 4만 년 전 인류가 착용했던 것인데, 매우 정교할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팔찌로 추정된다. 그들이 장신구를 사용한 최초의 인류가 맞다면, 필수품만 알았던 앞선 인류보다 한 단계 진화한 인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만 년 전 팔찌가 장신구였다는 증거는 없다. 팔찌가 내세나 현세의 안녕을 기원하는 주술적 물건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역시 부대용품이라기보다는 필수품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식은 밥'이 생기면 다양한 요리가 가능해진다. 꽃게무침, 유부초밥, 밥 피자, 갱시기죽 등은 식은 밥으로 만들 때 제격이다. 딱 정량의 밥만 짓는 집에서는 식은 밥을 이용한 색다른 요리를 시도해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식은 밥으로 요리를 만들다 보면 한두 개쯤 독특한 게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액세서리처럼 기능이나 실용과 무관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류, '식은 밥'처럼 잉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집안은 실용과 정량만 고집하는 인류나 집안보다 더 풍요롭고 창조적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 이래 한국은 야만국이었던 적도, 선진국이었던 적도 없다. 늘 옆집(이웃 강대국)에서 먼저 만든 요리를 받아들인 덕분에 엉망인 요리를 만든 적도 없지만, 뛰어난 요리를 먼저 만들어 문화를 선도할 기회도 적었다.
1960∼1990년대 한국은 '식은 밥'이나 '팔찌'에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지금도 우리는 그 시절 관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은 많은데, 은메달과 동메달은 턱없이 적은 것도 잉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팔찌'와 '식은 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한국은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다. 정량을 고집하는 사회, 기능성과 효율성만 고집하는 사회는 언제나 2등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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