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亂後弼雲春望'(난후필운춘망, 전쟁 뒤 필운대의 봄 경치)
필운대의 봄-이호민(李好閔, 1553-1634)
황폐해진 성에는 꽃 피울 나무도 없고
봄바람에 저물녘 갈가마귀 내려올 뿐
옛 궁궐 가는 길 냉이 도라지 시퍼런데
봄이 와 밭 갈던 늙은이 금비녀를 주웠다네
荒城無樹可開花(황성무수가개화)
唯有東風落暮鴉(유유동풍낙모아)
薺苨靑靑故宮路(제니청청고궁로)
春來耕叟得金釵(춘래경수득금차)
삼천리금수강산을 초토화시켰던 임진왜란! 그 끔찍한 전쟁이 지나간 후에, 필운대(弼雲臺)에서 바라본 황량한 서울 풍경이다. 필운대는 경복궁을 포함한 도성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인왕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
필운대 부근에는 원래 아름다운 꽃나무가 유난히도 많아 봄날 꽃구경의 명소였다. 당연한 결과지만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조 선비들의 시문에도 필운대 꽃구경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전쟁 통에 경복궁이 완전 불바다가 되어버렸고, 도성 전체가 거의 폐허가 되어버렸다. 꽃 피울 나무가 있을 턱이 없다. 봄바람이 불면 꾀꼬리가 날아와서 꾀꼴꾀꼴 노래를 해야 하는데, 저물녘에 갈가마귀 떼가 내려앉는 황량한 풍경을 연출할 뿐이다.
그러나 겨울불이 지나간 자리에도 마침내 봄이 돌아오는 법! 불탄 옛 궁궐로 가는 길에는 그 폐허의 잿더미를 뚫고 냉이와 도라지가 시퍼렇게 자라나고 있다. 이 시의 핵심은 농부의 '금비녀 습득 사건'! 이 난데없는 사건을 두고, "우와! 그 농부 장땡을 잡았네"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빵점을 주면 된다. "뭐라고?, 농부가 금비녀를 주웠다고? 거 참 싱겁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인데?"라고 묻는 독자가 있다면, 똥글뱅이 하나를 주기도 아깝다. "가만있어 봐. 도대체 누가 떨어뜨린 금비녀일까? 궁궐 가는 길에서 습득을 했으니, 혹시 전쟁 통에 궁녀가 쫓기다가 떨어뜨렸나? 만약 그렇다면 추격자는 누굴까? 차마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거기서 벌어졌을 수도 있겠네. 모두가 전쟁으로 일어난 비극이니, 이 땅에서 전쟁을 추방해야겠어. 무엇보다도 남북이 총을 겨누고 있는 우리나라 앞날이 걱정이야"라고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아는 독자에겐, '참 잘했어요'도장을 쾅 찍고, 붉은 색연필로 똥글뱅이 다섯 개를 그려주면 된다.
똥글뱅이 몇 개짜리시냐 하는 것은 물론 시 자체에 달려 있다. 하지만, 독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
이종문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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